‹ 목록으로 이번 생엔 도망치겠습니다

3화

네 살이 된 나는 그 반년 사이 몸이 조금 자란 것보다 더 큰 변화를 겪었는데, 그건 말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남들보다 이르게 문장을 완성해서 말하는 아이를 보고 유모들은 신기해하며 서로 눈을 마주치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나는 그저 열아홉 살짜리 어른의 말버릇이 세 살짜리 성대를 조금 앞당겨 굴복시킨 것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몸은 아직 걸음도 서툴고 손가락도 짧아서 숟가락질조차 흘리기 일쑤였는데 머릿속만 멀쩍이 자라 있으니, 겉과 속이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 매일 이어졌다. 문제는 이 말버릇을 얼마나 숨기고 얼마나 드러내야 할지 매번 계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유모 앞에서는 어린애답게 어눌한 척 서너 단어만 흘리다가, 문득 논리적인 문장이 튀어나오려는 걸 삼키느라 혀를 깨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생에 서류 검토하던 버릇이 왜 하필 이럴 때 튀어나오는 건데.' 그렇게 매번 스스로를 단속했지만, 완벽하게 통제되는 인간은 없다는 걸 나는 곧 몸으로 배우게 되었다. 그 계산이 어긋난 대가를 치르게 된 자리가 바로 왕궁에서 열린 그 상견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저주받을 행사 이름에 상견례라는 단어를 붙인 사람은 작명 감각이 최악이다.'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나는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아버지 이도현 백작은 마차 문이 열리기 전부터 내 옷매를 세 번이나 확인했는데, 그 손길이 다정해서라기보다는 실수했을 때 본인이 감당할 문책이 두려운 쪽에 가까웠다는 걸 나는 이미 눈치로 알고 있었다. "표정 풀어라. 왕태자 전하 앞에서 그렇게 굳어 있으면 우리 가문 얼굴에 먹칠하는 거다." 백작이 낮게 속삭였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목소리를 냈다가 그 안에 뭐가 섞여 나올지 자신할 수 없어서였다. 왕궁 연회장은 예상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다. 대리석 바닥은 거울처럼 반짝여서 걸을 때마다 내 발끝이 그대로 비쳤고, 천장에는 금박을 두른 장식이 겹겹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 화려함이 오히려 숨을 조이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런 데서 넘어지면 그대로 역사에 남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걸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연회장 한쪽에 나란히 세워진 어린 영애들 사이에서 나는 제일 끝자리에 서 있었다. 다른 영애들은 저마다 곱게 땋은 머리와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몇몇은 벌써부터 지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까딱거리거나 옆 아이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 옆으로 붉은 머리를 곱게 늘어뜬 여자아이가 걸어와 자리를 잡는 걸 보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한서은. 아직 어린 얼굴이었지만 그 미소만은 전생의 그것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고,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 방식조차 어딘가 계산된 느낌이었다. 붉은 머리칼 한 올까지도 흐트러짐 없이 정돈되어 있는 게, 이 아이는 벌써부터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법을 배운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안녕, 넌 이도현 백작님 댁 딸이지?" 그 애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목소리를 냈다가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나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서은은 내 침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재밌다는 듯 눈을 살짝 접으며 웃었다. "말이 없네. 나는 원래 다들 말 많은 애들이 좋다고 하는데, 넌 좀 다르구나." 그 말투가 지나치게 능숙해서, 나는 이 아이가 정말 네 살배기인지 다시 한번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연회장 안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시종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트고 어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는 소리가 물결처럼 퍼져나갔는데, 나 역시 뒤늦게 그 흐름을 눈치채고 고개를 숙였다. 왕태자 이준혁이 등장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붉은 융단 위로 걸어오는 어린 남자아이의 걸음걸이는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절제되어 있었다. 팔의 각도, 시선의 높이, 걸음의 속도까지 모든 게 미리 정해진 규칙에 맞춰 움직이는 것처럼 딱딱했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인형 같다는 인상을 줬다. '저 나이에 저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게 재능인지 훈련의 결과인지 모르겠네.' 그가 줄지어 선 영애들을 하나씩 훑어보며 지나가는 동안 나는 심장이 뛰는 속도를 최대한 억누르려 애썼다. 정작 그의 시선이 내 앞에서 멈춘 게 아니라 내 옆, 한서은에게서 먼저 멈췄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동자가 붉은 머리카락 위에서 미묘하게 오래 머물렀다는 걸 나는 분명히 보았다. "백작님 댁 영애가 이쪽이었나?" 그가 시종에게 조용히 묻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 자리에 온 어른들조차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명단에 적힌 순서가 뒤바뀌었는지, 혹은 애초에 이 나라 관료들이 일을 그렇게 대충 하는지는 몰라도, 그 짧은 착오 하나가 훗날 얼마나 큰 함정으로 자라날지는 그때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시종이 서둘러 정정하며 나를 가리켰을 때, 이준혁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내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무심한 눈빛 안에는 흥미도 경계도 담겨 있지 않았고, 그저 다음 순서로 넘어가는 서류를 확인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전생의 마지막 순간 나를 외면하던 그 옆얼굴이 겹쳐 보여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는데, 그 순간만큼은 세 살짜리 몸이 아니라 그날의 그 자리, 목이 잘리기 직전의 그 자리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지금은 저 손에 목이 잘릴 일 없어. 아직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면서도 손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애써 시선을 발끝으로 내리며 숨을 골랐고, 이준혁은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별다른 말 없이 다음 영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안도가 되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때 한서은이 슬며시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낮게 속삭였다.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어?" 그 말이 단순한 아이의 호기심인지, 아니면 이미 뭔가를 알고 있는 자의 조롱인지 구분이 안 되어서,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붉은 머리를 늘어뜬 옆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애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분명 웃음의 형태를 봤는데, 그게 순수한 아이의 웃음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의 전조인지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행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아버지는 오늘 내가 얌전히 서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지만, 나는 그 옆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방금 본 두 장면을 자꾸 곱씹었다. 시선이 먼저 머문 자리, 그리고 뒤늦게 정정된 명단. 별것 아닌 착오처럼 보였던 그 순간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 나는 그날 밤 저택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도, 그리고 침실에 눕고 나서도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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