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가 방으로 들어온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문이 열리는 소리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다른 어른들은 대개 문을 벌컥 열거나 조심스레 두드린 뒤 하녀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는데, 이 남자는 마치 환자가 놀라지 않게 하려는 듯 문틀을 살짝 스치듯 열고 소리 없이 걸어 들어왔다. '직업병이구나.'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발소리를 죽이는 법을 훈련받은 사람 특유의 걸음걸이였다.
등불 아래 서 있는 남자의 인상은 조각가가 밤을 새워 깎아낸 것처럼 선이 분명했는데, 눈매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호수 같았고 콧날은 정교한 대리석 조각의 능선처럼 곧게 뻗어 있었으며, 입술은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은 얇은 굳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손은 환자를 진찰하는 데 익숙한 사람답게 크고 마디가 굵으면서도 움직임이 놀랍도록 조심스러웠다. 저 손으로 사람을 몇이나 살렸을까, 나는 잠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세 살짜리가 하기엔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감상이었지만, 어차피 겉으로 드러날 일은 없었으니 상관없었다.
그가 무릎을 굽혀 내 눈높이에 맞추며 "안녕, 아가씨" 하고 인사를 건넸을 때, 나는 이 남자가 이 저택의 다른 어른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걸 대사 한마디로 알아챘다. 다른 이들은 나를 향해 말할 때조차 시선은 부모 쪽을 확인하며 조율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 남자는 곧장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걸었다. '적어도 서류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부류는 아니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최대한 겁먹은 세 살짜리처럼 보이려고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연기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다. 그냥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으면 어른들은 알아서 귀엽다고 해석해줬으니까.
박현우라는 이름의 이 의사는 손목을 짚고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목 뒤를 살피는 순서로 진찰을 진행했다. 손목을 짚을 때는 손가락 끝이 맥을 짚는 자리를 정확히 찾아 들어갔고, 눈동자를 들여다볼 때는 등불을 살짝 기울여 눈부심을 최소화하는 배려까지 잊지 않았다. '프로다, 프로.'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런 배려는 훈련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오래 손에 익어야 나오는 종류의 것이었다.
정작 문제는 그가 목 뒤를 살피는 순간 내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목이라는 부위에 손이 닿는 감각 자체가, 밧줄이 감기던 그 서늘한 촉감을 몸이 먼저 기억해내는 것처럼 즉각적인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목이라는 부위에 대한 내 몸의 거부반응은 세 살짜리 아이의 단순한 낯가림으로 보이기엔 지나치게 정확하고 지나치게 강렬했고, 나는 그가 그 순간 눈썹을 아주 살짝 찌푸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들켰나.' 심장이 쿵쿵거렸지만 표정만은 그저 어리둥절한 아이처럼 유지하려고 애썼다. 사실 표정을 유지하는 것보다 심장 소리를 숨기는 게 더 어려웠다. 세 살짜리 몸은 심장박동을 감출 만한 지방층도, 여유도 없었으니까.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시녀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평소에도 목 쪽을 만지면 이러십니까?"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요즘 부쩍 그런다고 답했다. "네, 목욕시킬 때도 그러시고, 옷깃을 여며드릴 때도 몸을 트세요. 처음엔 그냥 목이 간지러우신가 했는데……." 시녀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이불 속에서 손끝을 꼭 말아 쥐었다. 이 정도로 관찰당하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그런 걸 들으며, 나는 이 남자가 단순히 열이나 재고 갈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눈치가 빠른 어른, 그것도 하필 지금 내 목을 만지고 있는 사람이라니. 하늘이 나를 놀리려고 작정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는 진찰이 끝난 뒤에도 바로 일어나지 않고 내 손을 가만히 살피더니, 손끝에 남은 작은 자국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손끝이 내 손바닥을 살짝 뒤집는 순간, 나는 숨을 죽였다. 사실 그 자국은 내가 낮에 무의식적으로 손끝에 마력을 흘려서 생긴 흔적이었는데, 전생에 계약서 작성 마법을 훈련하며 수백 번 반복했던 손동작이 몸에 새겨져 있다가 이 작은 몸으로도 새어 나온 결과물이었다. 손끝에 마력을 정교하게 모으는 훈련을 십수 년 반복하면 몸이 알아서 그 감각을 기억한다는 걸, 나는 전생에서야 배웠다. 그런데 그 버릇이 세 살짜리 몸으로도 그대로 새어 나올 줄은 몰랐다.
세 살짜리가 계약 마법의 잔흔을 손끝에 남긴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는 나도 알았지만, 지금 와서 숨길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이건 뭐라고 설명하지, 태교로 계약서를 읽었다고 할까.' 속으로는 실없는 농담을 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손을 슬며시 뒤로 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마저도 어색했는지, 손을 빼는 동작이 너무 빨라서 오히려 더 의심을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아, 망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저 졸린 표정을 지어 보이는 걸로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박현우는 그 흔적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별다른 말없이 내 손을 다시 이불 속으로 넣어주었는데, 그 손길이 다른 어른들의 그것과 달리 조심스러웠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손등을 덮는 이불의 자락을 정리해주는 손짓 하나까지도, 마치 유리로 만든 인형을 다루는 사람처럼 신중했다. 다른 이들의 손길에는 늘 어떤 형식적인 의무감이 묻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손길에는 그런 게 없었다.
"아가씨는 조금 특별한 아이인 것 같습니다."
그가 부모에게 그렇게 말하는 걸 문틈으로 들었을 때, 나는 그 말이 좋은 의미로 쓰인 건지 경계해야 할 신호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특별하다'는 말은 이 세계에서 두 가지로 쓰였다. 축복받은 재능이라는 뜻으로 쓰이거나, 혹은 위험 요소라는 뜻으로 쓰이거나. 백작가의 장녀에게 그 말이 어느 쪽으로 적용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버지 이도현은 그 말에 별 관심 없다는 듯 "그런가" 하고 넘겼고, 어머니 한지연도 특별하다는 말을 듣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였다. 그 무심함이라는 게, 어쩌면 무관심이 아니라 익숙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백작가 사람들에게 '특별하다'는 말은 워낙 자주 듣는 수사였을 테니까. 그 무심함 앞에서 나는 박현우가 뭔가를 알아챘으면서도 굳이 더 캐묻지 않고 넘어갔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 입을 다무는 건, 대개 더 크게 말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가 저택을 떠나기 전, 복도에서 시녀와 나누는 대화를 얼결에 들었는데, 왕실 쪽에서 조만간 후작가와 백작가의 어린 영애들을 모아 상견례 비슷한 자리를 마련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문틈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처지라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 나는 그 순간에도 자조적인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왕태자님 약혼 후보로 몇몇 가문을 검토하고 있다던데요." 시녀 중 하나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중에 우리 아가씨도 이름이 오른다는 얘기가 있어서……." 다른 시녀가 낮게 웃으며 뭐라 덧붙였지만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불 속에서 손끝이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심장이 아까 목을 만졌을 때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아직 세 살밖에 안 된 내가 벌써 그 저주받을 자리의 후보로 오르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전생에서 그 광장의 밧줄을 목에 감고서야 겨우 벗어났던 자리였는데, 이번 생에서는 세 살의 나이에 이미 그 자리를 향한 걸음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를 다시 그 광장으로 데려갈 첫걸음이 이렇게 빨리 시작될 줄은 몰랐다. 겨우 세 살인데. 아직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데, 벌써부터 저 멀리서 밧줄이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시녀들의 웃음소리가 멀어지고 나서도, 나는 오랫동안 눈을 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