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소모병 1년, 공주의 선택

1화

나는 시체 더미를 넘으며 걸었다. 다리 하나가 썩은 나무처럼 꺾여 있었다. 냄새는 이미 익숙했다. 살이 부풀어 오르는 냄새, 피가 마르며 나는 쇳내, 거기에 화약 냄새까지 섞이면 그게 이 진지의 공기였다. 창월제국 최전선, 명치 마을 외곽 진지. 여기서 나는 1년을 버텼다. 이곳 사람들은 나 같은 부대를 부를 때 이름을 쓰지 않았다. 그냥 '사망 부대'라고 불렀다. 숫자도 붙지 않았다. 붙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어차피 다음 달이면 절반이 죽고, 그다음 달이면 남은 절반의 절반이 죽었다. 그렇게 셈을 하다 보면 결국 남는 건 나 같은 몇 명뿐이었다. 나는 1년 전 이곳에 떨어졌다. 경주, 고분 유적, 도굴. 그날 밤 무덤 안에서 뭔가 이상한 빛을 봤고, 다음 순간 눈을 뜨니 이 세계였다. 어떻게, 왜, 그런 질문은 이미 오래전에 그만뒀다. 질문할 시간에 검을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살아남는 법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매일 밤 잠을 설쳤다. 지금은 시체 더미 옆에서도 코를 골 수 있었다. 그게 발전인지 퇴화인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양지호." 박노식이 내 이름을 불렀다. 이 부대에서 가장 나이 많은 병사였다. 흰머리가 섞인 수염, 깊게 팬 눈가, 그리고 여전히 살아 있는 눈빛. 그 눈빛만 보면 아직 스무 살은 더 버틸 사람처럼 보였다. "또 밤에 그거 불 거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 나는 피리를 꺼냈다. 지구에서 가져온 물건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주운, 대나무로 깎은 낡은 피리였다. 표면은 손때로 반질반질했고, 어느 죽은 병사의 유품이었을 것이다. 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냥 나 혼자 들으려고 부는 거였다.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날 밤도 나는 진지 한구석에서 피리를 불었다. 곡조는 없었다. 그냥 손가락이 가는 대로 소리를 냈다. 낮게, 짧게, 다시 낮게. 홍서준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용보세가 출신 귀족 도련님이었던 그는, 처음 이 부대에 왔을 때 매일 얻어맞았다. 손등에 아직도 그때 생긴 흉터가 남아 있었다. 지금은 살아 있다. 내가 몇 번 끼어든 이후로는. "형, 그 소리 들으면 좀 이상해요." "뭐가." "슬픈 것 같은데 형 얼굴은 하나도 안 슬퍼 보여서." 나는 피리를 내렸다. 달빛이 그의 얼굴 반쪽을 비추고 있었다. 순진한 표정, 아직 이 전선에 완전히 물들지 않은 표정이었다. "자라." "형은 안 자요?" "자라니까." 그가 웃으며 자리를 떴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다시 피리를 입에 물었다. --- 사흘 전, 정찰 중에 화살을 맞았다. 어깨였다. 뼈까지 박혔다. 그때는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아팠지만 그게 죽을 만큼은 아니라는 걸 이미 몸이 알고 있었다. 나태호가 옆에서 붕대를 감아주다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어제 맞은 거 아니었어?" 상처는 이미 반쯤 아물어 있었다. 살이 스스로 당겨 붙는 느낌이 있었다. 뜨겁고 간지러웠다. 마치 상처 안쪽에서 작은 불씨가 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이 세계로 넘어온 뒤부터 몸이 이상하게 빨리 나았다. 뼈가 부러져도 사흘이면 걸을 수 있었다. 베인 상처는 반나절이면 흉터만 남았다. 나태호는 그날 이후로 나를 좀 다르게 봤다. 유하준도 마찬가지였다. 대놓고 묻지는 않았지만, 시선이 달라졌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등 뒤에 항상 그 시선이 붙어 있는 걸 느꼈다. "저 새끼 괴물 아니냐." 뒤에서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목소리를 낮췄지만 다 들렸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소문이란 건 막을 수 없는 거였다. 그저 흘러가게 두는 게 나았다. 막으려 들면 오히려 더 커지는 게 이런 종류의 이야기였다. 박노식이 나중에 조용히 물었다. "위에서도 알고 있는 것 같더라." "뭘." "네가 좀 다르다는 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걱정인지 경계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눈빛이었다. --- 그리고 열흘 뒤, 전령이 왔다. 제국 문양이 찍힌 깃발을 든 기병 셋이 진지 안으로 들어왔다. 소모병 부대에 전령이 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명령을 받는 쪼가리 같은 존재였다. 우리에게 직접 무언가를 알리러 사람이 오는 일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병사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둘 모여들었다. 다들 얼굴에 긴장이 섞여 있었다. 좋은 소식일 리 없다는 걸, 이 전선에 있는 누구나 알고 있었으니까. 전령이 명단을 펼쳤다. 종이가 바람에 살짝 떨렸다. "창월제국 3공주, 서한별 전하께서 특별행동대를 조직하신다. 각 최전선 부대에서 생존 기간과 전투력을 기준으로 후보를 선발했다." 병사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다들 자기 이름이 불리길 바라면서도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특별행동대. 그 말 자체가 이 전선에서는 두 가지 뜻으로 통했다. 살아 나갈 기회, 아니면 더 빨리 죽을 기회. "양지호." 내 이름이 불렸다. 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 몇몇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 안에 부러움과 의심이 반씩 섞여 있었다. "강철수." 두 번째 이름이 이어졌다.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강철수. 적석성 대장장이 아들. 살인으로 이 전선에 배치된 놈. 11개월을 버티며 부대 안에서 자기 세력을 만든 놈. 그리고, 홍서준을 반쯤 죽이려던 놈. 그날 밤 홍서준의 얼굴이 어땠는지 아직도 기억이 났다. 눈두덩이 부어서 눈을 뜰 수 없었고, 입술이 갈라져 피가 배어 나왔다. 그때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그놈도 아직 살아 있었다. 박노식이 낮게 중얼거렸다. "둘 다 뽑혔네." 나는 전령이 읽어 내리는 나머지 이름들을 듣지 않았다.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찼다. '왜 하필 나야.' 몸이 빨리 낫는다는 것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오래 살아남았기 때문일까.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게 제일 불안했다. 그리고, 왜 하필 강철수도인가. 같은 부대에서, 같은 이름이 동시에 불렸다는 게 우연일 리 없었다. 위에서 뭔가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 둘을 나란히 세워 놓고 뭘 확인하려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멀리서 강철수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간 채로. 피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나무가 살짝 삐걱거렸다. '같은 곳에 가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전령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지만, 나는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강철수의 눈빛, 그리고 그 뒤에서 불안하게 나를 바라보는 홍서준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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