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나는 그 눈을 발견하고 얼음처럼 굳었다. 텃밭 울타리 너머, 관목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검은 삼땋음머리와 회색 눈동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 감각, 익숙하다. 전생에서 누군가에게 마법을 들켰을 때마다 느꼈던 그 오싹함.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까지 똑같았다.
"누구야."
최대한 낮게, 위협적으로 말했다. 다섯 살짜리 목소리라 위협감이 얼마나 실렸을지는 모르겠지만.
관목이 부스럭거렸다. 나는 손끝에 남아 있던 초록빛을 얼른 갈무리했다. 이미 늦은 것 같긴 했지만.
관목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나보다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열 살쯤 될까. 헐렁한 회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손톱 밑에 흙이 잔뜩 끼어 있었다. 볼에는 흙먼지가 한 줄 그어져 있었고, 그게 꼭 전투 분장 같아서 웃길 뻔했다.
"저... 정원사 딸이에요. 나리라고 해요."
나리.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함이 있었다. 아, 정원사네 아이. 저택에서 몇 번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다. 늘 흙을 잔뜩 뒤집어쓰고 뛰어다니던 아이였다.
"얼마나 봤어?"
목소리가 저절로 딱딱해졌다. 이건 다섯 살 어린애의 톤이 아니었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그런 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금이요. 손에서 초록빛 나는 거랑, 물이 움직이는 거랑, 그리고..."
그녀는 말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에 두려움이 아니라 뭔가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두려움이 아니라고?
이상했다. 전생의 경험상, 마법 쓰는 걸 들킨 사람을 보는 눈빛은 딱 두 종류였다. 경멸, 아니면 계산. 지금 이 눈빛은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신기했어요. 진짜 예뻤어요."
예쁘다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 전생을 통틀어 내 마법을 보고 예쁘다고 말해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조롱하거나, 무시하거나, 아니면 이용하려고 들었다. 스승이라던 사람도 내 마법을 보고 처음 한 말이 "쓸모없는 속성이군"이었다.
그런데 예쁘다니.
"뭐가 예뻐. 그냥 풀 마법이야."
일부러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려고 신경 써야 했다.
"그래서 더 예뻐요. 언니 손에서 나온 초록빛이 진짜 새싹 같았어요. 저 나무들도 원래 저렇게 태어났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나리가 손가락으로 텃밭 구석에 서 있는 늙은 배나무를 가리켰다. 그러곤 다시 내 손을 쳐다봤다. 초록빛이 사라진 지 오래인 그 손을 마치 아직도 빛나고 있는 것처럼.
나는 그 아이를 오랫동안 쳐다봤다. 열 살짜리 정원사 딸이 하는 말이 지나치게 순수했다. 이 세상에 아직 이렇게 순수한 시선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전생의 스물여덟 해를 살아오면서도 이런 눈빛은 처음 봤다.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나는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 않은 채 말했다. 만약 이 아이가 저택에 이 사실을 퍼뜨린다면, 아버지의 시선이 다시 쏠릴 게 뻔했다. 그 시선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전생에서 이미 뼈저리게 배웠다.
"네! 안 말할게요. 대신..."
나리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한테도 좀 보여주시면 안 돼요? 그 초록빛 나는 거요."
와.
이 상황에서 이런 부탁을 하다니. 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묘하게 웃음이 나왔다. 협박도 아니고 흥정도 아니고, 그냥 보고 싶다는 순수한 요청이라니.
"보여주면 뭐 해줄 건데."
"음... 저 이 텃밭 관리하는 법 알아요. 저희 아빠가 정원사시라서요. 흙 만지는 법, 씨앗 심는 법 다 알아요. 그거 알려드릴게요."
제법이었다. 이 다섯 살짜리 몸으로는 텃밭 일도 서투른 게 사실이었으니까. 삽질 한 번 하려다 넘어져서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좋아. 대신 진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만약 걸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야."
"네!"
나리가 신나게 대답하며 울타리를 넘어 들어왔다. 다리가 짧은 것도 아닌데 울타리 하나 넘는 데 세 번은 넘어질 뻔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웃었다.
그 뒤로 며칠간, 우리는 텃밭에서 은밀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초록빛을 조금씩 보여주면서 마법을 연습했고, 나리는 그 옆에서 흙을 만지고 씨앗을 심는 법을 알려줬다.
"이 씨앗은 여기 심으면 안 돼요. 볕이 너무 없어서."
"그럼 여기?"
"거기가 딱 좋아요."
"왜 그런지는 알아?"
"음... 그냥 아빠가 그렇게 하래요."
솔직한 대답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나리는 자기가 아는 만큼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손끝으로 흙의 상태를 가늠하는 감각, 씨앗을 심는 깊이, 물 주는 시기까지. 책으로 배운 게 아니라 손으로 배운 지식이라 오히려 더 미더웠다.
작은 대화들이 쌓여갔다. 나리는 신분 차이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냥 순수하게 나를 친구로 대했다. 전생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관계였다. 그때는 누구든 나에게 다가올 때마다 그 뒤에 숨겨진 목적을 먼저 계산했었는데, 나리 앞에서는 그런 계산이 필요 없었다.
박순희도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처음엔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그녀도 눈감아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나리가 올 때마다 몰래 간식을 챙겨주기도 했다. 마른 떡이나 구운 감자 같은 걸 슬쩍 담벼락 밑에 놓아두는 식이었는데, 나리는 그게 어디서 나오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신나게 받아먹었다.
"아가씨가 웃는 걸 보니 좋네요."
박순희가 그렇게 말한 날, 나는 처음으로 이 별채가 감옥이 아니라 안전한 곳처럼 느껴졌다. 좁고 볕도 잘 안 드는 방이었지만, 여기에는 나를 조롱하지 않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이 방이 전생의 그 화려한 저택보다 나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나는 텃밭에서 독초 내성을 더 정교하게 다듬었고, 물을 조종하는 법도 조금씩 능숙해졌다. 공간마법은 여전히 아주 미세한 수준이었지만,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밤마다 이불 속에서 손끝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 보는 연습을 반복했다. 성공률은 낮았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감각이 있었다.
나리는 그동안 텃밭에서 상추와 무를 심는 법, 벌레를 쫓는 법, 흙에 재를 섞는 법까지 다 가르쳐줬다. 어느새 텃밭은 다섯 살짜리 손으로 가꾼 것치고는 제법 그럴싸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박순희가 다급한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손에 봉인된 편지 한 장을 들고 있었다. 그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나는 나리와 씨앗을 고르다가 손을 멈췄다.
"아가씨. 이거... 후작님께서 보내신 거예요."
나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봉인을 뜯는 손끝이 살짝 떨렸다. 몇 달 동안 나에게 관심조차 없던 아버지가 갑자기 편지를 보냈다는 게 이상했다. 그 무관심이 나를 지켜준 방패였는데, 이제 그 방패가 깨지려는 건가.
편지를 펼치자, 안에는 왕립 마법학원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입학 통지서였다.
나는 그 인장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좋은 쪽으로 뛰는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전생에서 이 학원에 입학했던 그날부터, 내 인생의 모든 배신이 시작됐다는 걸 나는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선우. 그리고 스승이라 믿었던 사람.
둘 다 그 학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웃는 얼굴로 다가와, 결국 등에 칼을 꽂았던 그 손길들이.
박순희가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얼굴이..."
나는 편지를 조용히 접었다. 이번엔 다르게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다짐을 시험할 순간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리가 옆에서 흙 묻은 손으로 내 소매를 슬쩍 잡았다.
"언니, 왜 그래요? 무서운 편지예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섭다고 해야 할지, 반갑다고 해야 할지, 나조차도 아직 정리가 안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