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스승님, 이번엔 안 속아요

4화

그림자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이불 속에서 숨을 죽이고 그 방향을 노려봤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귀에 다 들릴 정도였다. 별채로 옮겨진 지 며칠이나 됐는데, 밤중에 방문 앞을 서성이는 건 처음이었다. 누구지. 설마 아버지 쪽 사람인가. 전생 기억을 다 되짚어봐도 이 시점에 나를 감시할 만한 사람은 딱히 없었다. 그런데도 심장은 자꾸만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려냈다. 다섯 살짜리 몸뚱이가 이렇게까지 겁이 많을 일인가 싶었지만, 몸의 반응은 내 의지랑 상관없이 제멋대로였다. 문이 살짝 열렸다. 그리고 라벤더색 머리가 먼저 보였다. 박순희였다. "아가씨, 아직 안 자세요?"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이었다. 다른 누군가였다면 손바닥을 숨긴 게 무의미해졌을 테니까. 아까까지 텃밭에서 만지던 그 독초, 그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골치 아파질 뻔했다. "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손에 작은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더니 보따리를 풀었다. 안에는 따뜻한 빵과 우유가 들어 있었다. 빵에서 올라오는 김이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저녁을 제대로 못 드셨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뭔가 뭉클해졌다. 다섯 살짜리 몸의 감정 반응이 이렇게 즉각적일 줄은 몰랐다. 스물여덟을 살았던 기억이 있어도, 이 몸의 호르몬이나 신경계는 별개로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전생이었으면 이 정도 일에 눈물 흘릴 일은 없었을 텐데. "고마워요." 빵을 받아 먹으며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전생에서도 이 사람만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처형되기 전까지도, 감옥 창살을 붙잡고 울던 게 이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등을 돌렸는데, 이 사람 하나만은 끝까지 남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런 신뢰가 쌓이지 않았다. 그냥 담당 유모일 뿐이다. 그 사실이 조금 서글펐다. 내가 아는 박순희는 저기, 미래에 있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아직 나를 잘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빵을 반쯤 삼켰을 때,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가씨." 박순희가 잠시 머뭇거리다 이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풀 마법이 그렇게 나쁜 게 아니에요." 나는 씹던 걸 멈추고 그녀를 쳐다봤다. "제 고향에도 풀 마법을 쓰시는 어르신이 계셨거든요. 그분이 마을 사람들 상처를 다 낫게 해주셨어요. 독에 중독된 사람도 살려내시고, 흉작이 들었을 때는 밭에 씨앗을 다시 심어서 반년 만에 곡식을 얻게 하셨어요." 와. 이건 전생에서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풀 마법에 대해 이렇게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나는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난 것 같았다. 전생 내내 들었던 말은 하나였다. 풀 마법은 하급이다, 쓸모없다, 저주받은 재능이다. 그 말을 하도 들어서 나조차도 의심 없이 믿었다. "진짜요?" "네. 그 어르신 덕에 저희 마을은 흉년에도 굶어 죽은 사람이 없었어요. 아가씨도 그렇게 훌륭한 마법사가 되실 수 있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생에서 나는 풀 마법을 저주라고만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번 생에는 다르게 볼 수도 있는 걸까. 같은 마법인데, 누가 그걸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거였나. 박순희는 내가 빵을 다 먹을 때까지 옆에 앉아 있다가, 우유잔까지 챙겨 들고 조용히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동안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 누워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마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별채 뒤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는데,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잡초만 무성했다. 나는 그곳을 내 연습장으로 삼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별채,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텃밭. 조건은 완벽했다. 전생의 기억을 하나씩 되살렸다. 독초를 구별하는 법, 그 독성을 중화시키는 법, 씨앗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법. 처음엔 잘 되지 않았다. 다섯 살짜리 몸의 마나 그릇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스물여덟 살 스승급 마법사의 머릿속 지식을 다섯 살짜리 몸으로 구현하려니, 이건 뭐 컴퓨터 게임에서 만렙 캐릭터 지식을 신규 캐릭터한테 그대로 우겨넣는 꼴이었다. 머리는 아는데 손이 안 따라주는 느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텃밭에서 실수로 독성이 강한 풀을 만졌다. 이파리 뒷면이 자줏빛으로 얼룩진, 전생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분명 위험한 종이었다. 그 즙이 피부에 닿으면 물집이 잡혀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뭐지. 나는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붉은 자국도, 물집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손이었다. 놀란 마음에 같은 풀을 한 번 더 만져봤다. 이번엔 즙을 손바닥에 아예 문질렀다.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독초 내성. 전생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풀 마법 적성자는 대부분 독초에 취약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나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전생의 나였다면 이 풀 하나 잘못 만졌다가 손바닥이 부풀어 올라 사흘은 고생했을 텐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전생의 지식과 이번 생의 몸이 만나면서 뭔가 특별한 게 생긴 것 같았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텃밭을 더 뒤지기 시작했다. 이 독초, 저 독초, 심지어 곰팡이가 낀 부분까지 손으로 만져봤다. 전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쯤 되면 확인이 아니라 검증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마나를 손끝에 모으며 물을 다루는 상상을 해봤다. 텃밭 구석에 고여 있던 작은 물웅덩이 위로 손을 뻗자, 물이 아주 살짝 솟아올랐다. 손끝 크기만 한 물방울이 허공에 잠시 매달렸다가 다시 떨어졌다. 수마법. 적성 검사에서는 풀 마법만 나왔는데, 나는 지금 물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곱씹어 보다가, 문득 전생에서 스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적성이란 것은 그저 가장 강한 재능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 다른 마법을 아예 못 쓴다는 뜻은 아니라는 말.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다중 마법을 익히지 못하는 건, 그럴 만한 재능이나 노력이 없어서라는 말도. 전생에서는 그 말을 그냥 흘려들었다. 스승이라는 사람도 결국 나를 풀 마법사로 낙인찍고 방치했으니,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들렸다. 지금 이 손끝에서 물방울이 솟아오르는 걸 직접 보고 있으니까. 나는 며칠 동안 텃밭에서 몰래 훈련을 계속했다. 낮에는 얌전히 방에서 뜨개질이나 하는 척, 밤에는 다들 잠든 틈을 타서 텃밭으로 나갔다. 독초 내성을 재차 확인하고, 물을 다루는 연습을 하고, 심지어 아주 작은 공간을 왜곡시키는 상상도 해봤다. 손바닥 안에 작은 틈을 만들어서, 그 틈으로 돌멩이 하나를 쏙 넣어보는 상상. 말도 안 되는 시도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 상상이 아주 미세하게나마 현실이 되는 걸 느꼈다. 돌멩이가 잠깐 사라졌다가, 손바닥 반대쪽에서 툭 떨어졌다. 공간마법. 이건 웬만한 귀족가에서도 최상위 적성으로 취급받는 마법이었다. 전생에서 이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을 딱 한 명 봤는데, 그 사람은 왕실 마법사였다. 그런 마법을 다섯 살짜리, 그것도 풀 마법 적성으로 낙인찍힌 내가 흉내 내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박순희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이 재능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순간, 아버지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쏠릴 게 뻔했으니까. 그리고 그 시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나는 이미 전생에서 배운 게 있었다. 관심은 곧 이용이었고, 이용은 곧 소모였다. 나는 아직 소모될 준비가 안 돼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낮에는 계속 서툴게, 밤에는 몰래 능숙하게, 이중생활을 이어갔다. 낮에는 흙장난이나 하는 다섯 살짜리, 밤에는 세 가지 마법을 동시에 굴리는 정체불명의 존재.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텃밭 구석에서 이 모든 마법을 연습하던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작은 회색 눈이었다. 풀숲 사이에서 깜빡이지도 않고 나를 응시하던 그 눈은, 내가 손끝의 물방울을 거둬들이는 순간까지도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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