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박순희는 하루에 세 번씩 내 방을 들락거리며 식사를 챙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아침엔 세숫물을 데워 와 손목까지 꼼꼼히 닦아주고, 점심엔 원피스 단추를 하나씩 채워가며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밤엔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발이 차진 않은지 확인했다. 전생 스물여덟 해를 살면서 누구에게도 이런 보살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걸, 나는 이 몸에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나도록 여전히 낯설어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손길이 익숙해질 때마다 스스로 경계했다. 편해지지 말자. 이 사람도 결국은 이 집의 하인이고, 이 집의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결말을 보장받는 건 아니었다. 전생에서 배운 게 딱 하나 있다면 그거였다.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손을 씻겨주는 그녀의 손길이 따뜻하다는 걸 부정할 순 없었다. 물비누 향이 옅게 남은 손끝으로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문질러줄 때마다, 나는 이게 무슨 감정인지 이름 붙이길 포기했다. 참 아이러니했다. 경계심과 온기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게.
"아가씨, 오늘은 후작님께서 저녁 식사에 함께하신다고 하셨어요."
박순희가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리본을 매는 손가락이 평소보다 느렸다. 그 조심스러움에서 나는 뭔가를 읽었다. 아버지가 저녁 식사에 함께하는 게 흔한 일이 아니라는 것.
"자주 안 오시나 봐요."
"그게, 요즘 도련님 때문에 바쁘셔서요."
박순희는 말을 아꼈다. 그 말끝에 뭔가가 더 있었지만 다섯 살짜리 앞에서 굳이 꺼내지 않는 게 이 집의 예의였다.
전생에도 아버지는 나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청하 후작, 냉정하고 계산적인 사람. 자식이라기보다 가문의 자산 목록에 이름 하나 올라간 존재로 나를 대했다. 그런데 다섯 살짜리인 지금은 어떨까. 아직 나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은 상태일까. 아니면 이미 계산이 시작된 걸까.
식당으로 들어서자 이미 상석에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짧게 다듬은 검은 수염, 날카로운 눈매. 전생에서 봤던 그 얼굴 그대로였다. 다섯 살짜리 눈으로 다시 보니 그 눈매가 더 크고 더 무섭게 느껴졌다. 옆자리에는 어머니 한씨가 조용히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세 살배기 도현이었다. 아이는 얌전히 앉아 있었는데, 그 작은 얼굴이 이 방의 냉기와 어울리지 않게 유독 붉고 따뜻해 보였다.
"왔느냐."
아버지가 짧게 말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인사라기보다는 출석 확인 같았다.
"네, 아버지."
다섯 살짜리 목소리로 존댓말을 하는 게 아직도 이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몸에 맞는 말투를 익혀야 했다. 전생의 말투가 튀어나올 때마다 나는 혀를 씹는 기분으로 문장을 다시 조립했다.
식사는 침묵 속에서 진행됐다. 접시에 포크가 부딪히는 소리, 하인들이 조용히 움직이는 발소리. 그게 전부였다. 스프를 뜨는 은수저 소리마저 죄스러울 만큼 조용한 식당이었다. 나는 그 침묵이 낯설지 않았다. 이 집은 원래 이런 곳이었으니까. 오히려 낯선 건 이 침묵을 견디는 다섯 살짜리 몸이었다. 전생의 나는 이런 분위기를 코웃음으로 넘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작은 발이 의자 아래서 달랑거리는 게 신경 쓰였다.
그런데 식사가 끝날 무렵, 아버지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곧 마법 적성 검사가 있을 것이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 마법 적성이 무엇인지. 전생에서 스물여덟 해를 살면서 그 마법으로 얼마나 조롱받았는지도.
풀 마법.
귀족 사회에서 가장 경멸받는 적성. 불 마법이나 뇌전 마법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수마법처럼 실용적이지도 않다는 이유로. 겨우 잡초나 다루는 힘이라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마법. 사교계 파티에서 누군가 "저 애 적성이 뭐라고 했지?" 물으면, 대답을 들은 사람들이 잠깐 침묵하다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짓던 걸 나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화분에 물이나 주라는 야유. 잡초나 뽑으라는 조롱. 다섯 살짜리 몸으로 다시 그 시절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게, 새삼 실감났다.
"이서윤. 네 나이가 벌써 다섯이니 검사를 받을 때가 됐다."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나는 미묘한 기대를 느꼈다. 딸이 뛰어난 적성을 가지길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 전생에서 그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아버지의 얼굴이 어떻게 식어갔는지, 그 뒤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얼마나 사무적으로 변했는지.
"네, 아버지."
나는 최대한 평온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이미 다음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어떻게 굳어질지. 이번에는 미리 알고 있으니 덜 아프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예상과 각오가 아픔을 완전히 막아주진 않는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 박순희가 내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무서우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섭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다 겪은 일이었다. 이건 재방송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번엔 조금 다르게 대처하고 싶었다. 전생처럼 순진하게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이번엔 처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것.
"안 무서워요."
"그래도 혹시 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요?"
박순희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이 사람은 이미 이 집 사정을 아는 사람이었다. 풀 마법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그 걱정이 고맙기도, 부담스럽기도 했다.
"결과는 결과일 뿐이에요."
다섯 살짜리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엔 너무 담담했는지, 박순희가 잠깐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못 본 척 앞만 보고 걸었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손바닥을 펼쳤다. 마법을 발동시키는 방법은 전생에서 배운 대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나를 손끝으로 모으고, 이미지를 그리는 것. 나는 작은 새싹 하나를 떠올렸다.
손바닥 위로 아주 작은 초록빛이 스쳤다. 정말 미세한,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놓칠 정도의 빛이었다. 불 마법사들의 손끝에서 화려하게 피어오른다는 불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초라할 정도로 조용한 빛.
풀 마법. 역시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구나.
나는 그 빛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전생에서는 이 빛이 그저 저주라고 생각했다. 왜 나만 이런 걸 가지고 태어났나, 하늘을 원망도 해봤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보였다. 이건 그저 시작점일 뿐이다. 이걸 어떻게 키우느냐가 문제였다. 전생에서는 이 빛의 쓸모를 아예 찾아보지도 않고 포기해버렸다는 걸, 나는 이제서야 후회하고 있었다.
손바닥의 빛이 잦아들고 나서도, 나는 한참 동안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었고, 그 아래 내 작은 손가락들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저택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하인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방문 너머로 새어 들어왔다.
"오늘 마법사님이 오신다던데."
"검사하러 오시는 거지? 큰아가씨 말이야."
"그럼 곧 알게 되겠네."
"불 마법이면 좋을 텐데, 후작님 젊으실 때 뇌전 마법사였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검이나 잘 쓰셨다며?"
하인들의 목소리엔 은근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후작가의 장녀가 어떤 적성을 가졌는지,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 목소리들을 들으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저 사람들도 결과를 듣는 순간 표정이 바뀌겠지. 놀람에서 실망으로, 실망에서 은근한 무시로. 그 과정을 나는 전생에서 이미 다 봤다.
이 사람들도 곧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그리고 그걸 안 순간, 이 집이 나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할지.
창밖으로 마차 소리가 들렸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검사관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손바닥을 다시 펼쳐봤다. 아무 빛도 없었다. 당연했다. 아직 준비운동도 안 한 마나가 아침부터 튀어나올 리 없었다.
박순희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이제 준비하셔야 해요."
나는 대답 대신 침대에서 발을 내리고 바닥을 짚었다. 차가운 나무 바닥의 감촉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