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해 여름, 7월.
장마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학교 뒷마당에는 늙은 플라타너스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나무 그늘 밑에 낡은 벤치가 하나 있었는데, 페인트가 벗겨져 나무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자리였다.
준서와 나는 그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매미 소리가 시끄러웠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열 마리, 스무 마리가 한꺼번에 우는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준서는 손에 아이스크림 막대를 쥐고 있었는데, 이미 다 먹고 남은 나무 막대였다.
그 막대 끝을 손톱으로 긁으면서 준서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너희 부모님은 왜 안 계셔?" 준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손끝에 다시 저릿함이 올라왔다.
익숙한 감각이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잠깐 그 저릿함을 참았다.
"아빠는 내가 태어나던 해에 집을 나갔어." 내가 말했다.
"엄마는 그다음 해 겨울에 돌아가셨고."
준서는 아이스크림 막대를 만지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그 온기가 조금 낯설어서 몸을 살짝 움츠렸다.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내가 말을 이었다. "내 손에 있는 이 별력이, 원래는 아빠한테 있던 거래."
"그게 무슨 소리야?" 준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나는 손끝을 들어 보였다.
햇빛 아래서 보면 손끝 안쪽에 아주 미세한 빛이 감도는 게 보였다.
평소엔 잘 안 보이지만, 저릿함이 올라올 때는 유난히 선명해졌다.
"별력은 원래 대를 이어 내려오는 힘인데, 보통은 성인이 돼야 나타난대." 내가 설명했다.
"근데 나는 태어날 때부터 손에 있었어."
"그게 왜?" 준서가 다시 물었다.
준서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면서,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할아버지도 처음엔 이 말을 나한테 여러 번 나눠서 해줬으니까.
"할아버지 말로는, 아빠가 힘을 나한테 다 넘기고 사라진 거래." 내가 말했다.
"그래서 아빠 몸엔 아무것도 안 남았고, 나는 아기 때부터 이렇게 됐다고."
준서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놀라움과 함께 어떤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그럼 너희 아빠는..." 준서가 말을 하다 멈췄다.
뒷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게 느껴졌다.
"몰라.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몰라." 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리는 걸 스스로 느꼈다.
나는 그 떨림을 감추려고 일부러 손을 더 세게 무릎에 눌러 붙였다.
"엄마는 그것 때문에 아빠를 원망하다가 돌아가셨대." 내가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딱 한 번 말해준 거야. 그다음부터는 절대 이 얘기 안 꺼내셔."
매미 소리가 잠깐 끊겼다가 다시 크게 울렸다.
준서는 아이스크림 막대를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힘들었겠다." 준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기억도 안 나는데 뭐."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나는 매일 밤, 이불 속에서 손끝의 빛을 볼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렸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이 저릿한 감각 하나로만 상상했다.
'아빠는 지금 몇 살일까.'
'나처럼 손이 저릿거릴까, 아니면 이제 아무것도 안 느껴질까.'
그런 질문들을 혼자 되뇌다가 잠드는 밤이 많았다.
준서는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었지만, 옆에서 계속 막대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계속 네 친구 할 거야." 준서가 갑자기 말했다.
"별력이고 뭐고 상관없이."
나는 그 말이 고마워서 코끝이 시큰거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매미 소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마워." 내가 짧게 대답했다.
준서는 그 말에 씩 웃으며 아이스크림 막대를 내 손에 슬쩍 쥐여줬다.
아무 의미 없는 나무 막대였지만, 나는 그걸 한참 동안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날 이후, 준서는 정말로 내 곁을 지켰다.
같은 반이 아닌데도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 앞에 와서 기다렸다.
점심시간에는 늘 내 옆자리에 앉았다.
한서연과 유하린도 나와 준서, 넷이서 자주 어울렸다.
서연이는 말이 빠르고 웃음소리가 큰 아이였고, 하린이는 반대로 조용하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넷이 모이면 늘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그 웃음에 맞춰 장난을 쳤다.
방과 후에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오백 원짜리 뽑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네 명이 함께 있으면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것 같았다.
'이 관계는 영원할 거야.'
그때 나는 그렇게 믿었다.
정말로, 의심 한 번 없이 믿었다.
하지만 세상은 아이 넷의 우정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학교 전체를 뒤흔드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5학년 강태호가 20명 가까운 아이들을 이끌고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다들 슬쩍 벽 쪽으로 붙어 서서 길을 비켜준다는 말도 들렸다.
급식실에서는 강태호가 앉는 자리 주변 두세 테이블이 항상 비어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강태호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조차, 그저 먼 학년의 낯선 이름일 뿐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