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 별은 꺼지지 않는다

2화

1년 전, 3월. 정선 산골마을에는 버스가 하루에 세 번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첫차는 아침 여섯 시 반, 막차는 저녁 여섯 시였다. 나는 그 시간표를 외우고 있었다. 겨울이면 그마저도 눈 때문에 끊기는 날이 많았다. 나는 그해 초, 할아버지 손을 잡고 마을 어귀 정류장에 서 있었다. 도시 학교로 전학을 가는 날이었다. 정류장 옆에는 낡은 슬레이트 지붕의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문이 닫혀 있었다. 할아버지는 일흔셋이었고, 손마디가 나무껍질처럼 거칠었다. 그 손으로 할아버지는 내 가방끈을 두 번 당겨 매만졌다. 가방은 형이 쓰던 걸 물려받은 것이었다. 지퍼 한쪽이 고장 나 있었다. "부모 없이 큰 놈이라고 무시당하지 마라." 할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는 몰라도, 기죽지는 마라." 할아버지가 덧붙였다.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던 해에 사라졌고, 어머니는 그다음 해 겨울에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할아버지는 그 이상은 말해주지 않았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버스가 도착했다. 낡은 초록색 버스였고, 앞유리에 금이 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버스에 오르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그 손을 바라보았다. 버스 안에서 나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산등성이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마을에서 벗어날수록 산은 낮아졌다. 두 시간쯤 지나자 산은 완전히 사라지고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 나는 2학년 1반 맨 뒷자리에 배정받았다. 교실은 마을 학교보다 세 배는 넓어 보였다. 책상마다 아이들 이름표가 붙어 있었는데, 내 이름표만 아직 없었다. 담임이었던 문세영 선생님이 나를 소개했다. "정선에서 전학 온 이도윤입니다." 교실 안에서 몇몇 아이가 킥킥 웃었다. 옷차림 때문이었다. 나는 형이 입던 걸 물려받은 낡은 점퍼를 입고 있었다. 소매 끝이 해져 있었고, 지퍼 손잡이 대신 노끈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숙인 채였다. 쉬는 시간, 나는 화장실 앞에서 한 남자애와 마주쳤다. 작고 통통한 체형에, 볼이 유난히 발그레했다. 박준서였다. "너 그 옷 진짜 오래된 거다." 준서가 대뜸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으로 점퍼 소매를 슬며시 잡아당겼다. "근데 나쁘다는 뜻 아니야. 나도 형아 옷 물려 입거든." 준서가 웃으며 덧붙였다. 준서는 자기 옷 소매를 들어 보였다. 팔목 안쪽에 이름표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다른 사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거 우리 형아 이름이야." 준서가 말했다. 그게 첫 대화였다. 다음 날, 급식 시간에 준서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식판을 든 채 두리번거리다가 곧장 내 옆으로 걸어왔다. "오늘 반찬 뭐야?" 준서가 물었다. "고등어조림." 내가 대답했다. "난 고등어 싫어하는데." 준서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먹어줄게." 내가 말했다. 준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자기 몫을 내 식판에 옮겨 담았다. 젓가락으로 고등어 살을 발라 옮기는 손길이 익숙했다. "너 원래 이렇게 잘 먹어?" 준서가 물었다. "어." 내가 짧게 대답했다. "신기하다." 준서가 웃었다. 그날부터 준서는 매일 내 옆자리에 앉았다. 급식실에서도, 교실에서도, 심지어 운동장 조회 시간에도 준서는 내 옆줄에 섰다. 일주일 후. 비가 오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하늘이 흐렸는데, 하교 시간이 되자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산이 없던 나는 교문 앞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마 밑에 서서 빗물이 떨어지는 걸 보고 있었다. 신발이 조금씩 젖어들었다. "같이 쓰자." 준서가 우산을 내밀었다. 노란색 우산이었고, 손잡이 부분에 준서 이름이 매직으로 적혀 있었다.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엄마가 써준 거야." 준서가 말했다. 우리는 나란히 걸으며 집으로 향했다. 우산이 작아서 한쪽 어깨가 자꾸 빗물에 닿았다. 준서는 그때마다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너희 집은 어디야?" 준서가 물었다. "저 아래 셋방." 내가 대답했다. "우리 집은 저 위 골목이야." 준서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낡은 이층 양옥이었다. 담벼락에 금이 가 있었고, 대문 페인트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들어올래?" 준서가 물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걱정하실 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이미 준서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다른 아이의 집 안에 발을 들였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데, 신발장 안에 크기가 다른 운동화 세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거실 벽에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준서와 준서 아버지, 어머니가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준서 아버지는 준서를 목마 태우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옆에서 손뼉을 치고 있었다. '좋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부모 사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웠다. 우리 집엔 사진이랄 게 없었다. 할아버지 방 서랍 속에 흑백사진 몇 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준서는 냉장고에서 요구르트 두 개를 꺼내 하나를 내게 건넸다. 플라스틱 뚜껑을 벗기는데 손이 미끄러워 두 번이나 헛돌았다. "조심해서 마셔. 흘리면 엄마한테 혼나." 준서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삼켰다. 달았다. "우리 친구 하자." 준서가 불쑥 말했다. "어... 어." 나는 더듬으며 대답했다. 준서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요구르트 병을 내 병에 부딪쳤다. 딱, 하는 작은 소리가 났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창밖으로 빗소리가 계속 들렸다. 준서네 거실은 따뜻했고, 요구르트는 달았다. 그때는 몰랐다. 이 우정이 나중에 얼마나 나를 아프게 할지. 다만 그날 저녁, 요구르트를 나눠 마시며 나는 오랜만에 웃었다. 빗물에 젖은 신발도, 낡은 점퍼도 그 순간만큼은 잊고 있었다. 준서가 웃을 때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그때는 정말 몰랐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