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낯선 도시의 첫 밤을 여관방에서 보낸 이서은은,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거리로 나서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터전을 살피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은 왕국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그 빛이 비추는 풍경만은 낯설기 그지없어서, 그녀는 잠시 창가에 서서 낮게 이어진 지붕들과 그 사이로 흐르는 좁은 골목들을 눈에 담으며 이곳이 정말로 자신이 몸을 숨기고 살아가야 할 곳이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왕국에서 가져온 돈은 넉넉하지 않았고,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살아가야 하는 처지였기에, 그녀는 무엇보다 먼저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나 역시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녀는 여관을 나서며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고, 품속에 넣어둔 몇 개의 은화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오늘 하루 동안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다짐을 곱씹었다.
시장 골목을 걷던 중,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제 보았던 낡은 나무 간판을 매단 작은 주점이었는데, 간판에는 투박한 필체로 '별빛 주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로 벗겨진 페인트가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간판 아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이서은은, 낡았지만 정갈하게 정리된 문 앞의 화분들을 보며 이곳을 운영하는 사람의 성정을 어렴풋이 짐작해보았다.
주점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 뒤에서 술병을 정리하고 있던 여인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 그 여인은, 이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나이에 다소 지친 기색이 얼굴에 배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다부지고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으며, 팔뚝에 새겨진 옅은 흉터 자국이 그녀가 결코 순탄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음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한소영이었다.
"일손을 구하고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이서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한소영은 잠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그 시선은 마치 물건의 값을 매기듯 냉정했는데, 이서은은 그 시선 아래에서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등을 곧게 세우고 있었다.
"보아하니 험한 일은 해본 적 없는 아가씨 같은데, 여기는 주점이야. 힘도 써야 하고, 취객도 상대해야 하고, 아무나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다소 냉소적인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섞여 있다는 것을, 이서은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저 말투는...... 사람을 밀어내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걱정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리는 자신 있습니다. 그리고...... 몸을 쓰는 일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담담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태도에 한소영은 잠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다시 술병 정리로 돌아갔다.
"말로는 뭐든 할 수 있지. 오늘은 일단 됐으니 다른 곳을 알아봐."
단호한 거절에 이서은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지만, 억지로 매달리지 않고 조용히 주점을 나섰는데, 그것은 이런 식의 거절에 익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점을 나서며 그녀는 문득 왕궁에서 검술 스승이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서두르지 마라. 진정한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반드시 다시 찾아오는 법이니.'
그 말을 곱씹으며 그녀는 낯선 거리를 하염없이 걸었고,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즈음에야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날 저녁, 이서은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인적이 드문 골목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놔! 이거 놓으라니까!"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에 이서은이 재빨리 골목 안쪽을 살피자, 세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낮에 보았던 한소영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소영의 손에는 주점 하루 매출로 보이는 돈주머니가 들려 있었고, 남자들은 그것을 노리고 그녀를 골목으로 몰아넣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조용히 내놓기만 하면 다치지는 않을 텐데."
남자 중 하나가 비열하게 웃으며 그녀의 팔을 붙잡으려는 순간, 이서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골목 안으로 몸을 던졌다.
타악!
짧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서은의 발끝이 남자의 팔을 걷어차 돈주머니를 붙잡으려던 손을 튕겨냈고,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뭐, 뭐야 이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남자를 향해 이서은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세를 낮추었는데, 그것은 왕국의 체술 스승에게 수년간 배워온 자세였고, 몸에 새겨진 습관은 위기의 순간에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구나...... 그때 그 훈련이 헛되지 않았어.'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으로는 스승의 매서운 목소리와 수없이 반복했던 낙법의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 하나가 성급하게 달려들자, 이서은은 그의 팔을 붙잡아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고, 상대는 자신의 체중에 의해 그대로 바닥에 내던져졌다.
퍽!
둔중한 소리와 함께 남자가 바닥에 쓰러지자, 남은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고, 이서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머지 한 사람의 다리를 걷어차 균형을 무너뜨렸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가 신음하며 팔을 감싸 쥐는 사이, 이서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는데, 그 서늘한 눈빛에 남자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 듯 몸을 움찔거렸다.
"이, 이런 미친......"
남은 한 명이 뒷걸음질 치며 재빨리 골목 밖으로 도망쳤고,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 끝나자 골목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한소영은 놀란 눈으로 이서은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숨소리가 거칠게 골목 안에 퍼지는 가운데, 그녀는 자신을 구해준 이 낯선 여인의 정체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숨을 몰아쉬며 던지는 물음에, 이서은은 옷매를 정리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낮에 말씀드렸던 대로, 몸을 쓰는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말에 한소영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어이없다는 듯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 이거 참, 사람 보는 눈이 없었나 보네."
한소영은 떨어진 돈주머니를 주워 들고는, 여전히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이서은을 위아래로 다시 훑어보았는데, 그 시선에는 낮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 이를테면 경계심이 걷혀나간 자리에 자리 잡은 순수한 궁금증이 담겨 있었다.
"이름이 뭐야?"
"서은입니다."
이서은이라는 성을 굳이 밝히지 않고 이름만 짧게 대답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한소영은 무언가 사정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좋아, 서은. 내일부터 나와. 요리사 겸...... 뭐라고 해야 하나, 용병 겸이라고 해두지."
짧은 제안이었지만 그 안에는 확실한 신뢰가 담겨 있었고, 이서은은 처음으로 이 낯선 도시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곳을 찾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근하게 데워지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발붙일 곳을 찾았어.'
그동안 억눌러왔던 긴장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짧게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보며, 한소영은 돈주머니를 품에 안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이서은은 그 뒤를 따르며 별빛 주점의 불빛이 골목 끝에서 흐릿하게 새어 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동안 한소영은 몇 번이나 흘깃 그녀를 돌아보며 무언가 묻고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은 채 그저 앞장서 걸어갈 뿐이었고, 그 침묵 속에서 이서은은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그날 밤, 이서은은 낯선 도시의 낯선 침대에 누워 오늘 벌어진 모든 일을 되짚어보았고, 처음으로 자신이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냈다는 사실에 조용한 만족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야.'
창밖으로 스며드는 낯선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그녀는 그렇게 다짐했고, 오랜만에 편안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이, 저 멀리 왕궁에서는 그녀의 흔적을 찾기 위한 은밀한 움직임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으며, 그 그림자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녀가 있는 이 낯선 도시를 향해 뻗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