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추방 영애, 숨겨진 체술

3화

삐걱. 마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서은은 시종의 무뚝뚝한 손짓을 따라 낡은 마차에 올라탔고, 등 뒤로 닫히는 문소리가 그녀와 이 왕국 사이의 마지막 연결마저 끊어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덜컹.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창밖으로 익숙했던 왕궁의 첨탑들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 것이 보였고, 이서은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의 안에서 예상치 못한 감정이 조용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놀랍도록 가벼운 해방감이었다. '드디어...... 끝났구나.' 마음속으로 그 말을 되뇌는 순간, 이서은은 지난 5년간 자신을 옥죄고 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고, 그것은 단순히 혼약이 파기되었다는 사실을 넘어선, 훨씬 근원적인 해방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이 왕국에서 살아온 시간은 언제나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다. 왕세자비가 되기 위해 완벽해야 했고, 공작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흠이 없어야 했으며, 사교계에서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진짜 감정은 언제나 뒤로 미뤄두어야 했었다. 문득, 몇 달 전 어느 다과회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이서은 영애는 참, 완벽하다는 게 저런 거구나 싶을 정도네요. 웃는 것조차 흠이 없으니." 그 말을 뱉었던 후작 영애의 입가에 걸려 있던 것은 칭찬이 아니라 비웃음이었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것을 알면서도 부채로 입을 가리며 미소를 흘렸을 뿐이었다. '그때도...... 나는 웃어야만 했었지.' 그 웃음이 얼마나 무거운 가면이었는지, 이서은은 마차 안에서야 비로소 온전히 실감하고 있었다. 귀족 사회라는 것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소모하는 정교한 착취의 구조였고, 그 안에서 완벽함이란 사랑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도구로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이서은은 마차의 흔들림 속에서 새삼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사랑한 적이 없었어. 그저...... 이용할 가치가 있었을 뿐.' 냉정한 결론에 도달한 순간, 이서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는데, 그것은 씁쓸함과 동시에 어딘가 후련한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웃음이었다. 마차는 며칠 동안 국경을 향해 달렸고, 그 여정 동안 이서은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들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조용히 계획을 세워보았다. 첫째 날에는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고, 둘째 날부터는 손끝으로 무릎 위에 놓인 마법서의 표지를 무의식적으로 쓸어내리며 앞으로 배워야 할 것들을 하나씩 헤아려보기 시작했다. 왕국을 떠난다는 것은 곧 공작가의 딸이라는 신분도, 이서은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던 모든 특권도 함께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 사실이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전생에서 쌓아온 실무 경험과, 이 세계에서 갈고닦은 마법과 체술, 그리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요리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생에서 그녀는 회계와 경영을 다루던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숫자를 다루는 감각과 사람을 상대하는 노련함은 이 세계 어디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무기였으며, 거기에 이 세계에서 익힌 검술과 초급 마법진을 다루는 능력까지 더해진다면, 굳이 누군가의 아내나 며느리로서의 삶에 매달리지 않아도 충분히 홀로 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제부터는...... 누구의 소모품도 아닌,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갈 거야.' 창문에 이마를 대고 그렇게 다짐하던 이서은의 머릿속에, 자신이 알고 있던 소설의 전개가 문득 다시 떠올랐다. 원작 속에서 악역 영애로 그려졌던 자신의 캐릭터는, 파혼과 추방 이후 조용히 서사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고, 그 뒤로 이야기는 오롯이 강현준과 윤세아의 로맨스를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 책 속에서 이서은이라는 이름이 다시 언급되는 것은 딱 한 줄, "그녀는 국경 너머로 사라졌다는 소문만 남긴 채 다시는 왕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는 문장뿐이었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쓰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소설이 그려내지 않은 여백, 즉 추방된 이후의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소설에 없는 페이지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써 내려갈 수 있겠지.' 확신에 찬 다짐을 되뇌며 이서은은 옆에 놓인 작은 짐 가방을 끌어안았는데, 그 안에는 급하게 챙긴 최소한의 옷가지와 몇 권의 마법서, 그리고 도윤이 마지막 순간 그녀의 손에 몰래 쥐여준 작은 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마차 안에서 그 주머니를 열어보았을 때, 이서은은 그 안에 든 것이 이도윤이 몇 달 동안 모아온 용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작은 은화들이 손바닥 위에서 짤랑거리며 부딪히는 소리를 낼 때마다, 도윤이 조그만 손으로 그것들을 하나씩 모아 담았을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고, 그럴수록 목구멍 안쪽이 뻐근하게 조여드는 것을 참아내야만 했다. "누나, 이거...... 얼마 안 되지만, 가지고 가." 떠나기 직전, 도윤이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건네며 했던 그 말이 다시금 귓가에 맴돌았고, 그 순간 이서은은 애써 참았던 눈물을 결국 몇 방울 떨어뜨리고 말았다. '도윤아...... 정말 고마워.' 작은 주머니를 손에 꼭 쥐고, 그녀는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며칠간의 여정을 이어갔고, 국경을 지나 인접국의 영토로 들어선 순간부터는 풍경이 완전히 낯설게 바뀌기 시작했다. 왕국의 정갈하고 화려한 건축물 대신, 소박하지만 활기가 넘치는 시장 거리와 나지막한 지붕들이 늘어선 소도시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말투의 억양도, 심지어 거리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마저도 왕도와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니고 있었다. 빵을 굽는 고소한 냄새와,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악기 소리, 그리고 상인들이 물건을 흥정하며 외치는 활기찬 목소리들이 뒤섞여 이서은의 귓가로 밀려들었고, 그 낯섦이 오히려 그녀에게는 위안처럼 느껴졌다. 마차는 그런 거리를 지나 작은 도시의 중심가에 이서은을 내려놓았다. 덜컹. 마차의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에 이서은은 짐 가방을 들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내려섰고, 낯선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왕도에서는 결코 느껴본 적 없는 자유로움이 함께 실려 오는 것 같았고, 그 감각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반가웠다. 이곳에서라면, 그녀는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완벽한 미소를 짓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눈을 뜬 순간, 이서은의 시야에 낯선 도시의 번잡한 거리 풍경과, 그 사이로 삐걱거리는 나무 간판을 매단 작은 주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간판에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페인트가 벗겨진 글씨로 무언가 적혀 있었고, 그 문 앞에는 유난히 사람들이 몰려 서서 시끄럽게 웅성거리고 있었는데, 그 소란의 중심에 서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아, 이서은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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