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추방 영애, 숨겨진 체술

1화

샹들리에의 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대연회장 한가운데서, 이서은은 방금 자신의 귀를 스치고 지나간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잠시 숨을 삼켰다. "이서은 양과의 혼약을 파기하겠소." 왕세자 강현준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마치 오늘 저녁 메뉴를 정하듯 가볍게 그 말을 내뱉었고, 연회장을 가득 채운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서은에게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뭐라고 했지.' 귀에 들어온 말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짚어보았지만 뜻은 변하지 않았고, 이서은은 자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표정을 다스렸다. 바이올린의 선율이 여전히 연회장 한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 우아한 음률이 지금 이 순간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손에 쥐고 있던 와인잔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5년이었다. 열두 살에 정혼자로 정해진 이후로 지금까지, 강현준의 취향에 맞추어 예법을 익히고 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밤을 새워 외교 문서를 검토하던 시간들이, 그 짧은 한 문장으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새벽까지 등불 아래에서 국경 지역 통상 조약의 초안을 살피던 밤들이, 강현준이 무도회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상대국 왕족의 이름과 취향을 밤새 외우던 시간들이, 그렇게 쌓아온 5년이라는 세월이 지금 이 순간 종이처럼 가볍게 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서은은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강현준의 옆에는 낯선 여인이 서 있었는데, 백금발이 촛불에 반짝이는 것이 마치 갓 짜낸 버터처럼 부드러웠고, 커다란 벽안은 겁먹은 사슴처럼 촉촉하게 젖어 있어 그것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남작가의 딸, 윤세아였다. 이서은은 그녀를 몇 번인가 사교 모임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예법이 서투르고 왕실 역사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그런 부족함이 오히려 사람들의 보호욕을 부추기는 듯했고, 그 사실이 이서은에게는 낯설고도 이상한 기분으로 다가왔었다. 한번은 왕실 주최 다과회에서 윤세아가 찻잔의 손잡이를 반대로 잡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 자리에 있던 귀족 부인들이 오히려 그 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리던 광경이 떠올랐고, 만약 자신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면 결코 그런 식으로 넘어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씁쓸함을 남겼다. "공작 영애께 참으로 죄송하지만......" 윤세아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강현준의 팔에 매달리며 속삭이자, 그는 대번에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사람들 앞에서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아를 두고 다른 사람과 혼인할 수는 없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서은 양이 아니라 세아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소." 확신에 찬 그 말투에 담긴 오만함이, 이서은의 가슴 한복판을 뻐근하게 짓눌렀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알기는 하는 걸까.' 분명한 의문이 속에서 솟아올랐지만, 그녀는 그 물음을 삼키며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연회장 안의 시선들은 이서은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에 담긴 것은 동정이 아니라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대하는 듯한 냉소였고, 그것을 새삼 깨달은 순간 이서은의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촥. 누군가 부채를 펼치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고, 뒤이어 낮은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공작 영애가 저렇게 버려지는 걸 보다니......" "애초에 남작가 여식만도 못한 매력이었다는 뜻이겠지요." "5년을 함께한 사이에 저런 표정이라니, 정말이지 냉혈한이 아니고서야." 귓가에 스치는 조롱들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살갗을 찔러댔지만, 이서은은 놀랍도록 담담하게 그 모든 것을 받아넘기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이 순간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이서은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곳에서의 삶이 시작되기 전, 그녀는 대한민국의 어느 관공서에서 성실하게 서류를 처리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과로로 쓰러져 숨을 거둔 뒤 눈을 떠보니 이 낯선 왕국의 공작가 딸로 태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는 낯선 천장과 화려한 커튼, 그리고 낯선 얼굴의 유모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광경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던 기억이 선명했고, 자신의 이름이 이서은이며 이 나라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왕국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족히 몇 달이 걸렸다는 것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는 두려움과 혼란이 앞섰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이 세계가 자신이 읽었던 어떤 소설의 배경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자신이 그 소설 속에서 주인공에게 파혼당하고 버려지는 '악역 영애'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 또한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소설 속에서 이 장면은 그저 몇 줄로 스쳐 지나가는 배경 설명에 불과했지만, 실제로 그 한복판에 서서 수백 개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은 활자로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고, 그 낙차 앞에서 이서은은 자신이 아무리 오래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해도 완전히 무뎌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 이건...... 이미 정해져 있던 결말이었어.' 마음속으로 되뇌면서도, 이서은은 정작 이 순간이 다가올수록 자신의 안에서 자라나는 감정이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옅은 안도감이라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이 결말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지난 몇 년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준비를 해왔다는 것을, 국외로 옮겨둔 재산과 미리 알아둔 상단의 이름들과 낯선 땅에서도 살아갈 방도를 궁리하며 밤을 지새운 시간들을, 이 자리에 선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이서은에게 이상한 위안으로 다가왔다. 강현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서은 양은 오늘부로 왕국을 떠나야 할 것이오. 그것이...... 서로에게 가장 나은 선택일 테니." 국외추방이라는 말을 그는 애써 부드럽게 포장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냉정함은 조금도 가려지지 않았고, 이서은은 그 순간 자신의 심장이 이상하게도 가볍게 뛰는 것을 느꼈다. '추방이라니......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낯선 확신이 가슴 깊은 곳에서 조용히 번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이서은은 천천히 허리를 곧게 펴고 강현준을 마주 보았다. 주변의 귀족들은 저마다 부채 뒤로 입을 가리며 다음 장면을 기대하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들이 바랐던 것은 공작 영애가 무릎을 꿇고 매달리며 눈물로 호소하는, 그런 흔한 파혼극의 결말이었을 것이라고 이서은은 짐작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의 태도에 오히려 연회장이 술렁였는데, 그것은 그녀가 눈물을 쏟으며 매달리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강현준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뭘 기대했던 걸까...... 내가 무너지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나.' 이서은은 그런 강현준의 표정을 지켜보며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고, 그가 자신에게서 마지막으로 무엇을 바랐는지 짐작조차 하기 싫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그때, 윤세아가 강현준의 팔을 살짝 흔들며 그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고, 강현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서은을 향해 시선을 돌렸는데, 그 눈빛 속에는 아주 옅은 동요가 스치는 것도 같았지만 이서은은 그것을 굳이 붙잡아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무수한 시선들 속에서 단 한 사람, 저 멀리 문가에 서 있는 작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어 섰다. 여섯 살 어린 동생, 이도윤이었다. 그 아이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본 순간, 이서은의 담담했던 가슴 한쪽이 처음으로 욱신거리며 아파왔고, 작은 두 손을 꼭 쥔 채 언니를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무언가를 건드리고 지나갔다. '너까지 여기서 이 모습을 봐야 했다니......'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서은은 애써 그 시선을 피하며 몸을 돌려 연회장을 걸어 나갔다.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정적 속에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고, 등 뒤로 쏟아지는 수십 개의 시선과 낮게 이어지는 수군거림을 뒤로 한 채, 이서은은 한 걸음씩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문가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샹들리에의 화려한 불빛 아래 여전히 다정한 얼굴로 윤세아를 감싸안고 있는 강현준의 모습과, 그를 둘러싼 채 저마다의 흥미로운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귀족들의 얼굴이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에 담겼고, 그 광경을 눈에 새기며 이서은은 이것이 자신이 알던 이야기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되새겼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파혼과 추방이 결정된 그 연회장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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