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추방 영애, 숨겨진 체술

2화

연회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던 것은, 등 뒤로 쏟아지던 시선들의 무게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방금 목격한 이도윤의 젖은 눈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높은 천장에서 쏟아지던 샹들리에의 불빛이 아직도 눈꺼풀 안쪽에 남아 있는 것처럼 어지러웠고, 귓가에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잔향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 모든 소음을 뒤로하고 복도로 발을 내딛는 순간 이서은은 비로소 숨을 제대로 내쉴 수 있었다. 또각.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텅 빈 복도에 유난히 크게 울렸고, 그 소리를 들으며 이서은은 지난 5년의 기억들이 마치 물 위에 번진 잉크처럼 조용히 퍼져 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공작가의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태어난 순간부터 왕세자의 정혼자라는 무거운 자리를 짊어지고 있었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유년 시절부터 남들보다 몇 배는 더 혹독한 교육을 감당해야 했었다. 마법 이론과 실전 체술, 다섯 개 언어와 왕국 역사, 외교 예법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잠을 줄여가며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익혀냈지만, 정작 그런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은 공작가 안에 거의 없었다. 새벽까지 불을 밝힌 채 마법서를 펼쳐놓고 있었던 밤들이 얼마였는지, 손끝이 갈라지도록 검을 쥐고 체술을 반복했던 시간이 얼마였는지, 그런 것들을 헤아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직 결과만이 평가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서은이 완벽한 건 당연한 거지. 그 정도는 해야 왕세자비 자격이 있으니까." 아버지인 공작은 언제나 그런 말로 그녀의 성취를 당연한 것처럼 치부했고, 그 말 속에는 애정 대신 의무만이 담겨 있어서, 이서은은 아무리 뛰어난 결과를 내놓아도 결코 진심 어린 칭찬을 받을 수 없었다. 칭찬이라는 것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고, 그녀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언제나 작은 균열이 남아 있었고, 그것은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처럼 느껴졌었다. '왜 나는...... 항상 뒷전이어야 했을까.'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그 의문은 시간이 지나도 답을 찾지 못한 채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이후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전생에서도 그녀는 누군가에게 완벽함을 증명해야 했던 삶을 살았었고, 그 기억이 되돌아온 순간부터 이서은은 이 낯선 세계에서의 자신이 결국 또 다른 방식으로 같은 굴레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다른 존재는 이도윤이었다. 여섯 살 아래의 동생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누나가 밤을 새워 공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조용히 다과를 챙겨다 주었고, 그녀가 실수로 예법을 어겨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던 날에는 자신도 함께 벌을 받겠다며 나서기까지 했었다. "누나는 잘못한 거 없어. 내가 다 봤어." 작은 몸으로 당당하게 그렇게 말하던 이도윤의 모습이, 이서은에게는 이 낯선 세계에서 유일하게 진심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고, 그 기억은 지금도 가슴 한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동시에 아프게 만들었다. 그날 이도윤은 겨우 여섯 살이었는데도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자신도 벌을 받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공작은 어린 아들의 고집에 못 이겨 벌을 거두었지만, 그 일로 이서은은 밤새 이불 속에서 눈물을 삼켰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 흘렸던 눈물이 서러움 때문인지, 고마움 때문인지 그녀는 여전히 구분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눈물만큼은 계산되지 않은 순수한 감정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이도윤조차도 공작가라는 거대한 구조 안에서는 힘없는 존재였고, 그가 아무리 누나를 감싸려 해도 결국 공작가의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귀족가의 자제로 태어난 이상, 개인의 마음이나 의지는 가문의 이해관계 앞에서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었고, 그것이야말로 이 왕국의 귀족 사회가 은밀히 강요하는 규칙이었다. 왕세자와의 혼약이 파기될 위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무렵, 공작은 오히려 이서은을 불러 냉정하게 경고했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강현준 전하의 마음을 다시 붙잡아야 한다. 이 혼약이 깨지면 공작가의 미래도 없어." 집무실 책상 너머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아버지의 눈빛에는 걱정이나 애정이 아니라 오직 손익을 계산하는 냉정함만이 담겨 있었고,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이서은은 자신이 딸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도구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그 깨달음은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던 진실을 명확한 형태로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나는...... 소모품이었구나.' 마음속에서 그 말을 되뇌는 순간, 이서은은 이상하게도 슬픔보다 차가운 명료함을 느꼈고, 그것은 그녀가 전생에서 익힌 냉철함이 이 순간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귀족 사회라는 것은 결국 겉으로는 명예와 품격을 이야기하면서도 속으로는 서로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위선의 구조에 다름없었고, 그 안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완벽한 인형처럼 자신을 깎아왔던 것이었다. 혼약이라는 것도 결국 두 가문의 이익을 셈하기 위한 계약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 그 안에 사랑이나 진심이 자리할 곳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사실을, 이서은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해왔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계약이 파기되는 순간이 눈앞에 닥쳤음을, 그녀는 연회장에서 왕세자의 차가운 눈빛과 이도윤의 젖은 눈을 동시에 마주하며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복도의 끝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타박, 타박. 작은 발이 급하게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돌아보니 이도윤이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는데, 작은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며 이서은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기다렸다. "누나!" 이도윤은 그녀의 앞에 이르자마자 숨도 고르지 못한 채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고, 그 작은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숨을 몰아쉬느라 어깨가 오르내리는 동생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이서은은 그가 연회장에서부터 이곳까지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고, 그 마음이 고맙고 미안해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나가...... 정말 떠나야 하는 거야? 내가......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릴게. 이건 말도 안 되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다급하게 쏟아내는 말을 들으며, 이서은은 처음으로 담담했던 표정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느꼈고, 무릎을 굽혀 동생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괜찮아, 도윤아." 부드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는 애써 웃어 보였지만, 이도윤은 그 미소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 더욱 세차게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누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왜 누나만......" 말끝을 흐리며 흐느끼는 동생을 보며, 이서은은 가슴이 뻐근하게 아려오는 것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 죄책감 어린 눈물이야말로 이 왕국에서 자신이 받았던 유일한 진심이라는 사실에 서글픈 위안을 느끼기도 했다. 이도윤의 작은 손이 자신의 소맷자락을 놓지 않으려는 듯 더욱 세게 움켜쥐는 것을 느끼며, 이서은은 문득 이 아이가 앞으로도 이 거대한 공작가의 무게를 홀로 감당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아이만큼은...... 나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바람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바람을 완전히 접을 수는 없었다. "도윤이 덕분에...... 누나는 그래도 견딜 수 있었어." 낮게 속삭이며 그녀는 동생을 품에 안았고, 작은 몸이 들썩이며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이서은은 이 아이만큼은 자신이 겪은 위선의 구조에 물들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빌었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동생의 온기가, 지난 5년간 그녀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었던 진심의 온도였고, 그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반드시...... 이 아이만큼은 지켜지길.' 그 다짐을 마지막으로, 이서은은 동생의 어깨를 다독이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저 멀리서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다가오는 시종들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갈하게 맞춰진 구두 소리가 여럿, 규칙적으로 복도를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소리는 마치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조종처럼 들렸고, 이서은은 이도윤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시종들이 서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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