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볼모궁, 짝사랑의 죄

2화

다음 날 아침, 강태의가 왕진을 왔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이 별궁에서 저렇게 예의를 차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강태의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대개 노크도 없이 들어오거나, 아예 오지도 않았으니까. 칠십을 넘긴 노인인데도 걸음이 곧고 눈빛이 맑았다. 허리도 굽지 않았고, 손끝도 떨리지 않았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말을 몸으로 증명하는 사람 같았다. 이 궁 안에서 나에게 진심으로 다정한 사람은 이헌 오라버니와 강태의뿐이었다. 손가락으로 꼽아도 두 명뿐이라니, 인복이 참 야박한 인생이다. “맥이 여전히 약합니다, 공주님.” 그가 내 손목을 짚으며 미간을 좁혔다. 주름진 눈가에 잔뜩 근심이 배어 있었다. “약을 계속 안 드셨군요.”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다 들켰으니까. 침상 옆 서랍 안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약봉투를 그가 못 봤을 리 없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몸이 버티질 못해요.” “버티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나는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진심으로, 순수하게 궁금했다. 죽는다면, 그게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들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청할 때도, 문득 창밖의 새소리를 들을 때도 그 생각이 스며들었다. 강태의가 이 말을 듣고 정색했다. “공주님.” 목소리에 서릿발이 섰다. 평소의 온화한 어조와는 딴판이었다. “그냥 물어본 거예요.” 나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가 저렇게 정색하는 걸 보니 조금 미안해졌다. 걱정을 끼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가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는 듯했다. 안타까움, 답답함, 그리고 아주 조금의 두려움. “공주님은 아직 열여섯이십니다.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어요.” 살아갈 날이 많다는 말이 축복인지 형벌인지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대현국에서 태어나 여덟 해를 이곳 별궁에서 보냈다. 조국은 이미 멸망 직전이었고, 나를 데려가려는 사람도, 데려갈 이유도 없었다. 시녀 하나 없고, 재산도 없고, 지지 세력도 없는 나 같은 존재가 이 나라에서 무슨 가치가 있을까. 창밖으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오는데, 내 삶은 왜 이렇게 제자리에 멈춰 있는 걸까. “강태의 어른.” “말씀하세요.” “제가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가 손을 멈췄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방 안에는 그의 숨소리와 내 심장 소리만 남았다. “공주님이 살아 계신 것 자체가 의미입니다.” 너무 원론적인 대답이라 나는 웃음이 나왔다. 헛웃음에 가까운, 조금 씁쓸한 웃음이었다. “그런 대답은 어디서 배우셨어요.” “의서에는 안 나오지만, 사람 마음에는 늘 있는 답이지요.” 노인의 대답에 뭐라 반박할 말이 없어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것과, 그 말을 믿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지만. “공주님, 약은 꼭 드셔야 합니다. 제가 매번 이렇게 부탁드리는 이유를 아시지요.” “……알아요.” “아신다고 하시면서 왜 안 드시는 겁니까.” “귀찮아서요.”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살고 싶은 이유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 강태의가 얼마나 상심할지 알기에, 나는 늘 이렇게 가벼운 핑계로 넘어갔다. 그는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침상 곁에 새 약봉투를 하나 더 올려놓았다. “이건 오늘 저녁에 드십시오. 제가 내일 다시 와서 확인하겠습니다.” “매번 확인까지 하셔야 해요?” “공주님이 안 드시니 그럴 수밖에요.”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은근한 원망이 섞여 있는 것 같아서 나는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진료가 끝나고 강태의가 나가려는데, 문가에서 그가 잠시 멈췄다. 등을 돌린 채로, 마치 하기 어려운 말을 겨우 꺼내는 사람처럼. “공주님. 국왕 전하의 건강이 요즘 심상치 않습니다.” 순간 몸이 굳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로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각오는 하고 계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각오라니. 나는 그 말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했다. 국왕이 죽으면 이헌 오라버니가 왕이 된다. 그리고 왕이 된 그의 곁에는 어떤 여인이 서게 될까. 그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왔다. 국모의 자리에 앉을 사람. 이헌 오라버니와 함께 있을 그 사람이 나일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상상만으로 심장이 쿡쿡 쑤셨다. “그,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써 눌러 말했다. 강태의는 나를 잠시 더 바라보다가 조용히 목례하고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탁. 혼자가 되고 나서야 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언제부터 숨을 참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강태의가 나가고 나서 나는 창가에 앉아 별궁의 담장을 바라보았다. 저 담장은 이 방보다 딱 반 걸음 더 낮았다. 그마저도 나를 가두기 위한 계산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옛날에 그렇게 지어진 것뿐일까. 저 담장 밖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상인들이 물건을 흥정하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또 누군가는 이별을 하는 그런 세상. 나는 그 세상에 발을 들일 자격조차 없었다. 한도국에서 나는 그저 패전국의 흔적, 정치적 부채였다. 조국의 왕이었던 아버지는 이미 항복 문서에 도장을 찍고 사라졌고, 어머니는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언니는 어딘가에서 살아 있다고 들었지만 소식이 끊긴 지 오래였다. 나에겐 이제 남은 게 없었다. 가족사진 한 장 없고, 편지 한 통 오지 않는 삶. 로판 세계에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냥 원래 여기 살던 사람인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싶을 만큼 처지가 서글펐다. 그날 밤, 나는 오래된 습관처럼 침대 밑 낡은 목함을 꺼냈다. 나무 표면이 세월에 닳아 결이 반질반질했다. 그 안에는 대현국에서 가져온 유일한 물건, 작은 옥반지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었다. 반지를 손에 쥐고 나는 중얼거렸다. “어머니, 저는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답할 사람은 없었다. 반지는 그저 은은한 온기 하나 없이 차갑기만 했다. 옥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차가운 물건인지, 오랫동안 방치돼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반지를 다시 목함에 넣고 눈을 감았다. 방관자로 사는 게 편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을 게 없으니까. 그게 지난 여덟 해 동안 내가 스스로에게 가르친 유일한 생존법이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되뇌었지만, 이헌 오라버니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를 때마다 그 다짐은 조금씩 흔들렸다. 내일이면 그가 또 이 별궁에 들를지도 모른다. 국왕의 건강이 저리 위태롭다는데, 그는 또 얼마나 힘든 얼굴을 하고 나타날까. 그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런데도 잠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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