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쪼르륵.
찻잔에 물 따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북쪽 별궁의 아침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시녀도 없이 스스로 물을 끓이고, 스스로 옷을 여미고, 스스로 하루를 견뎌야 하는 곳. 여덟 해 전 대현국이 한도국에 패했을 때, 나는 여덟의 나이로 이곳에 끌려왔다. 인질이라는 단어는 어감이 참 우아하다. 실제로는 감금이라 부르는 게 맞았다.
여덟 해라는 시간이 길다고 해야 할지 짧다고 해야 할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여덟의 아이가 열여섯의 여인이 되는 시간이었으니 결코 짧지는 않을 텐데, 이상하게도 매일이 똑같아서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조차 무뎌졌다. 아침에 일어나 물을 끓이고, 낮에는 방 안에서 책을 읽거나 창밖을 보고, 밤이면 다시 잠드는 것. 그게 여덟 해 동안 반복된 하루의 전부였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색 담장 너머로 본궁의 지붕이 반짝였다. 저기는 늘 화려했다. 이곳은 늘 조용했다. 가끔은 저 반짝이는 지붕이 꼭 나와는 다른 세계에 속한 것처럼 느껴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으면서도, 실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는 것처럼.
“공주님, 안에 계십니까.”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명혜왕후의 궁녀였다. 저 목소리만 들어도 위장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걸 병이라 불러야 할지 조건반사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파블로프의 개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종소리만 들려도 침이 고이는 게 아니라, 뒤틀리는 위장을 붙잡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게.
“들어오세요.”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최대한 담담하게. 그것도 여덟 해 동안 연습해서 익힌 기술이었다.
문이 열리고 궁녀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약봉투 하나. 왕태후궁에서 보낸 탕약이라 했다.
“전날처럼 드시라 하셨습니다.”
전날처럼, 이라는 말이 참 서늘했다. 전날 그 탕약을 마시고 나는 반나절을 앓았다. 속이 뒤집히고 머리가 핑 돌아서, 침상에 누운 채로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걸 지켜봐야 했다. 몸이 허약한 탓에 약이 독하게 들었다고, 강태의가 진맥을 짚으며 혀를 찼었다. 명혜왕후는 그걸 알면서도 다시 보냈다.
나는 약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종이 위에 찍힌 인장까지 정갈했다. 정갈한 독약이라니,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마시지 않으면 불경죄, 마시면 몸이 죽어난다. 참 훌륭한 선택지였다. 마치 인생 자체가 그런 것 같았다. 죽거나, 아니면 조금 덜 죽거나. 게임으로 치면 난이도 선택창에 하드모드와 헬모드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는 이 게임에서 리트라이 버튼조차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거였다.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궁녀가 나가고 나서야 나는 약봉투를 슬쩍 밀어 창가에 놓았다. 매일 이런 식으로 쌓아두는 게 벌써 열 개가 넘었다. 언젠가 발각되면 그때는 정말 큰일이 나겠지만, 지금 당장 마시는 게 더 큰일이었다. 창가에 나란히 늘어선 약봉투들을 보면, 꼭 내가 견뎌낸 날들을 세는 달력 같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참 부지런히 쌓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또 났다. 이번엔 좀 다른 박자였다. 급하지도, 느긋하지도 않은, 딱 그 사람다운 박자. 나는 문을 열었다.
“이헌 오라버니.”
왕태자 이헌이 서 있었다. 훤칠한 키에 검은 머리, 짙은 눈매. 어딜 봐도 이 나라 최고 권력자의 자제답게 반듯한 인상이었다. 그가 이곳에 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본궁에서 이 별궁까지 오려면 최소 세 개의 문을 지나야 했고, 그 문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눈여겨보는 눈들이 있었으니까.
“얼굴이 왜 이래.”
그가 대뜸 방으로 들어와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어제 명혜왕후에게 뺨을 맞은 자리가 아직 붉었다. 그의 손끝이 스치자 따끔했지만, 나는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누가 괜찮냐고 물었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화를 내되 나에게는 부드럽게, 그러나 명혜왕후에게는 절대 대들지 않는 식으로. 그 이중적인 태도가 가끔은 답답했지만, 그게 그가 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뭐라 할 수 없었다.
“강태의를 부를까.”
“괜찮다니까요.”
나는 웃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웃지 않으면 그가 걱정하니까, 걱정하는 그를 보는 게 더 싫으니까. 사실 누가 누굴 걱정할 처지인지 생각하면 좀 웃기긴 했다. 이 별궁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이 가장 힘 있는 사람을 안심시키려 애쓰는 꼴이었으니.
그가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거기 쌓인 약봉투를 발견했다.
“이건 뭐야.”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 이건 좀 계획에 없던 전개인데.
“그, 그냥…….”
말이 끊겼다.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평소라면 궁녀들 시선을 피하는 것쯤 익숙한데, 이헌 앞에서는 왜 이렇게 서투른지 모르겠다.
그가 약봉투 하나를 집어 냄새를 맡더니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그 순간의 정적이 방 안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이걸 먹지 않고 모아두고 있었다고?”
“몸에 안 맞아서요.”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변명이라기엔 너무 초라했다.
“채은아.”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방식은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마치 깨질 것 같은 물건을 다루듯. 여동생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그게 위로가 될 때도 있었고, 서글퍼질 때도 있었다. 오늘은 후자였다.
“내가 아버님께 말씀드릴 거야.”
“그러지 마세요.”
나는 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손끝이 떨렸다.
“일 커지면 저만 더 힘들어져요. 오라버니가 아버님께 말씀드리면, 명혜왕후는 제가 뒤에서 오라버니를 부추긴 거라고 할 거예요. 그럼 저는 정말……”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다음에 올 상상은 굳이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 안타까움인지, 답답함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 나는 그걸 읽어내는 데 늘 실패했다. 여덟 해를 봐온 사람인데도 여전히 그의 속을 다 모르겠다는 게, 가끔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알겠어.”
그가 결국 한숨을 쉬며 약봉투를 다시 내려놓았다. 손길이 조심스러워서, 마치 그 종이 뭉치가 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뤘다.
“대신 다음부턴 이렇게 쌓아두지 말고 나한테 말해. 내가 어떻게든 처리할 테니까.”
“네.”
대답은 했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나도, 그도 알고 있었다. 이헌이 나설 때마다 명혜왕후는 더 독해졌다. 그건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증명된 사실이었다. 지난번엔 이헌이 나 대신 탕약을 마시겠다고 나섰다가, 명혜왕후가 사흘 동안 별궁에 사람 하나 들이지 못하게 막아버린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그가 자리를 뜨기 전, 잠시 문 앞에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 뒷모습이 왠지 평소보다 무거워 보였다.
“아버님 건강이 요즘 좋지 않으셔. 그래서 내가 자주 못 와.”
“괜찮아요. 저는 여기 익숙하니까요.”
익숙하다는 말이 이렇게 슬픈 단어였나. 입 밖으로 내고 나서야 그 말의 무게를 새삼 느꼈다. 익숙해진다는 건 결국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었으니까.
그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창가에 쌓인 약봉투들을 바라보았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종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마저도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열하나, 열둘.
앞으로 몇 개나 더 쌓일지 세어보는 게 요즘 내 유일한 취미였다. 그리고 문득, 언젠가는 이 숫자가 멈추는 날이 올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 답을 알기엔, 나는 아직 이 방 안에서 너무 오래 갇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