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기억, 진짜 안주인

5화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아침이었다. 이아라는 눈을 뜨자마자 천장의 무늬를 세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버릇이 생겼다. 흰색 몰딩 사이로 새겨진 넝쿨 문양이 몇 개인지, 어제와 오늘이 같은지를 확인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그렇게라도 정신을 붙잡아 두지 않으면 이 방이, 이 몸이, 이 삶 전체가 다시 미끄러지듯 낯설어질 것 같았다. '벌써 사흘.' 그동안 그녀는 방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백작저의 벽은 두꺼웠고, 그 벽 안에서 허락된 공간은 방과 복도, 딱 그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감금처럼 느껴져 숨이 막혔지만, 라라의 기억 속 게임 지식들이 하나둘 떠오를 때마다 이아라는 오히려 그 갇힘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배려였는지를 깨닫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이 몸으로, 아무런 방비 없이 밖을 나섰다가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몰랐으므로. 그날 아침, 하녀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방문을 열고 들어와 이아라에게 옷을 갈아입으라 청했을 때, 그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백작님께서 정원까지는 나가셔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대신, 반드시 저와 함께여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조건부 허락이었지만, 이아라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며칠 만에 처음 맛보는 승리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옷을 갈아입는 손끝이 살짝 떨렸는데, 그것이 기쁨 때문인지 낯선 몸에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는 스스로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녀가 허리끈을 조이는 동안에도 그녀는 자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문 너머에, 며칠 동안 상상만 하던 초록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벅찼다. '이게 이렇게 좋은 일인가.' 정원으로 나서자 오랜만에 맡는 바깥 공기가 폐 속까지 시원하게 밀려들었고, 잔디 위로 부서지는 햇살이 눈앞에서 반짝이며 부서지는 모습이 마치 오랫동안 꺼져 있던 화면이 다시 켜진 듯한 감각을 주었다. 코끝으로는 흙냄새와 풀 냄새, 어딘가에서 피어 있는 꽃의 단내가 섞여 들어왔다. 그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동시에 그리웠던 것처럼 느껴져서, 이아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라온이 저 멀리서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오며 손을 흔들었고, 그 뒤를 유모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짧은 다리로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아이의 걸음이 위태로워 보였는데, 몇 번이나 발을 헛디딜 뻔하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달려오는 것이 신기했다. 아이가 품에 뛰어들 듯 다가와 팔을 붙잡았을 때, 이아라는 처음으로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온기를 확실하게 느꼈다. 작은 손이 옷자락을 움켜쥐는 힘, 상기된 뺨, 숨이 조금 가쁜 채로도 웃고 있는 얼굴. '이게 엄마라는 자리인가.' 이아라는 그 생각을 하며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이 아이를 향한 감정이 완전히 자신의 것인지, 라라의 것인지, 아니면 이 몸에 새겨진 어떤 습관 같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구분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엄마, 저기 연못에 물고기 있어! 보러 가자!" 손을 잡아끄는 힘에 이끌려 몇 걸음 걷던 중, 이아라의 시야 한구석으로 정원 담장 너머의 길에 서 있는 한 남자의 그림자가 스쳤다. 낯선 옷차림의 그 남자는 저택 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 시선의 방향이 정확히 자신을 향해 있다는 느낌이 들어 이아라의 걸음이 저도 모르게 느려졌다. 라온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려 손을 당기고 있었지만, 이아라의 발끝은 잔디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저 사람, 아까부터 계속 저기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선을 느낀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이 그것이 그저 지나가는 행인의 우연한 눈길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뒤따르던 하녀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재빨리 다가와 소맷자락을 살짝 붙잡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부인, 저쪽은 신경 쓰지 마시고 이쪽으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나치게 서두르는 그 말투에, 이아라는 오히려 더 확실한 불안을 느꼈다. 아무 일도 아니라면 저렇게 다급하게 시선을 돌리라 말할 이유가 없었다. 하녀의 손가락이 소맷자락을 쥔 힘이 필요 이상으로 강했고, 그 눈빛에는 분명한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뭔가 알고 있구나, 이 사람도.' 라라의 기억 한 조각이 그 순간 스치듯 떠올랐다. 게임 속에서 이아라 캐릭터를 둘러싸고 은밀하게 움직이던 인물, 정략결혼을 강제했던 자작가의 인물이 이후 이야기 전반에서 계속 그녀의 주변을 감시하듯 맴돌았다는 설정이었다. 게임 화면 속에서 그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배경음악이 미묘하게 낮아졌던 것, 그리고 그가 나타난 장면마다 어김없이 무언가 나쁜 일이 뒤따랐던 것도 함께 떠올랐다. '서도현.'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게임 속에서 그 이름은 전처 서지연의 파국과 떼어놓을 수 없이 엮여 있었고, 그 파국의 끝에는 정욕약이라는 끔찍한 단어가 함께 붙어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떠올랐다. 그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고, 라온의 손을 잡은 손끝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설마 벌써.'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 인물이 벌써 이곳까지 나타났다는 사실이 이아라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원작의 흐름이 그녀가 알던 것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지, 그 경계가 어디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담장 너머의 남자는 이아라가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마주 보자, 오히려 옷깃을 정리하듯 천천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 여유로운 뒷모습이 어쩐지 더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발견된 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도망이 아니라 여유로운 후퇴처럼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엄마, 뭐 봐?" 라온이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잡아끌었고, 이아라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아이의 손을 마주 쥐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물고기 보러 가자."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높게 나온 것 같아서, 이아라는 스스로도 어색함을 느꼈다. 아이는 그런 것을 눈치챌 나이가 아니었는지 금세 다시 웃으며 연못 쪽으로 앞장서 걸었지만, 유모의 눈길이 잠시 이아라의 얼굴에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방금 목격한 그 그림자가 앞으로 자신의 삶에 어떤 균열을 만들어낼지 가늠하려는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연못에 다다르자 라온이 물속을 가리키며 신이 나 소리를 질렀다. 붉고 흰 물고기들이 수면 가까이 몰려들어 헤엄치는 모습이 평화로웠지만, 이아라의 눈은 자꾸만 담장 쪽으로 돌아갔다. 그 남자는 이미 사라졌지만, 그의 시선이 남긴 흔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정원 안쪽, 저택의 창문 하나에서 그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선우진의 시선도 그 남자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손끝이 창틀을 짚은 채 미세하게 굳어졌고, 오랜만에 정원으로 나선 이아라의 웃음을 지켜보던 눈빛 위로, 전혀 다른 종류의 냉기가 서서히 겹쳐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눈은 라온과 이아라가 손을 잡고 웃는 모습을 무심한 듯 좇고 있었는데, 담장 너머의 인영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 무심함은 완전히 사라졌다. '저자가 왜 벌써.' 짧은 생각 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창밖의 이아라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아이와 함께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 무해한 풍경과 조금 전 담장 너머에 서 있던 그림자 사이의 간극이 선우진의 속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가 아는 서도현이라면, 아무 이유 없이 이 저택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 시선이 정확히 정원을, 그리고 그 안의 그녀를 향해 있었다면. 다만 창가에서 몸을 돌려 서재로 향하는 그의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빨라졌다는 것만이 유일한 변화였다. 문을 나서기 전,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창밖을 다시 한번 살폈다. 이아라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언제까지 지켜질 수 있을지, 선우진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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