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문이 열리기까지의 그 짧은 순간, 이아라는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먼저 '실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게임 화면 속에서 수십 번 본 그 얼굴이 실제로 저 문 뒤에서 걸어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손끝이 이불깃을 움켜쥐었고,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귓속까지 울려오는 것 같았는데, 정작 몸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게 앉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마치 오랜 시간 이 순간을 대비해온 배우처럼.
'말도 안 돼. 이건 게임이 아니라 진짜였구나.'
그 생각이 뒤늦게 몸을 관통했다. 화면 밖으로 걸어 나온 캐릭터라는 표현조차 이제는 너무 낡은 비유처럼 느껴졌다.
문틀을 채우고 들어오는 것은 상상보다 훨씬 큰 체구였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눈빛은 온도가 없는 유리 조각 같았고, 어깨는 방문 자체를 좁게 만들 만큼 넓었으며, 걸음마다 옷깃에서 나는 은은한 나무향이 방 안의 약초 냄새를 잠식해 들어왔다. 그 향은 어딘가 서늘하면서도 낯설지 않게 익숙했는데, 이아라는 그 이질적인 감각의 이유를 알 수 없어 잠시 숨을 멈췄다.
선우진이었다. 화면 속 삽화보다 몇 배는 더 압도적인, 실물의 그. 종이 위에 그려진 선과 음영으로는 절대 담아낼 수 없는 밀도가 그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문가에 선 채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했는데, 그 시선이 마치 낯선 물건의 진위를 감정하는 감정사의 눈초리처럼 느껴져서, 이아라는 등에 식은땀이 배는 것을 느끼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릴 것 같았지만, 어디선가 배운 대로 최대한 침착한 척, 등을 곧게 세운 채 앉아 있었다.
'움츠러들면 진다.'
라라의 기억 속에서 이 남자는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 인물로 그려졌었다.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 이후 10년의 서사가 어떻게 흘러갈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눈물을 보인 여자 조연이 하루 만에 방 밖으로 쫓겨나던 장면, 겁먹은 시녀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그대로 저택에서 사라진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것들을 실제로 겪고 싶지는 않았다.
"정신이 드셨소."
낮고 짧은 그 한마디에는 안부보다 확인의 의미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이아라는 그것이 다정한 물음이 아니라, 그녀가 어디까지 깨어났는지를 가늠하려는 질문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의 목소리는 낮은 현악기의 저음처럼 방 안 공기를 무겁게 눌렀다.
"…네."
짧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켜 앉는 동안, 그녀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낯선 남자 앞에서, 그것도 자신이 알던 게임 속 가장 위험한 캐릭터 앞에서 이런 자세로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실감되었기 때문이었다. 얇은 잠옷 아래로 드러난 어깨선이 유난히 신경 쓰였고, 손목에 감긴 붕대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에서야 자신이 얼마나 오래 앓았는지를 실감했다.
선우진은 침대 곁 의자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그녀의 얼굴을 살피듯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안도와 의심이 반씩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정작 그가 안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아라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10년 전 그 벚나무 아래 소녀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 같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소녀가 웃던 표정, 바람에 날리던 꽃잎 하나가 그녀의 어깨에 앉았던 그 짧은 순간을 그는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여자의 눈동자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의 손끝을 조금 굳게 만들었다.
"의사 말로는, 십 년의 기억이 지워졌다더군."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아래로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진동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말을 뱉는 사이 그의 시선이 잠깐 그녀의 손목께로 떨어졌다가,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열아홉에 멈춰 있는 셈이오."
덧붙이는 말투에는 옅은 자조가 섞여 있었는데, 이아라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오히려 안심할 거리를 찾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자신을 해치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고, 상황을 설명해 주려는 최소한의 배려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녀는 속으로 숫자를 세어보았다. 열아홉에서 스물아홉까지, 통째로 사라진 십 년. 그 십 년 사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 커다란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게임에서는 이런 대사, 없었던 것 같은데.'
라라의 기억 속 선우진 루트는 대부분 침묵과 명령으로 채워져 있었고, 상황 설명 같은 것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이 남자가 게임 속 캐릭터와 완전히 같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 생각을 붙잡을 여유는 없었다. 어쩌면 이곳이 게임의 완전한 복제가 아니라, 그 세계와 닮았을 뿐인 전혀 다른 삶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뒤늦게 스멀스멀 올라왔다.
"라온은…"
그가 문득 이름을 꺼냈을 때, 이아라는 그것이 자신의 아들 이름이라는 걸 게임의 기억으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떠 보였다. 지금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이 어쩐지 더 위험할 것 같다는 판단이 순간적으로 섰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듯한 착각과 함께, 그녀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 아들이오. 여섯 살이지. 지금은 재우고 있으니, 당신이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 전엔 볼 필요 없소."
마지막 문장이 유독 단호하게 잘려나갔고, 그 단호함이 이아라의 귀에는 배려처럼 들렸지만, 사실 그것은 선우진 나름의 두려움에서 나온 명령이었다. 아이가 낯선 얼굴을 한 어머니를 보고 상처받을까 봐, 그리고 그녀가 아들 앞에서 낯선 사람처럼 굳어버릴까 봐, 그는 미리 그 장면을 차단해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여섯 살배기 아이가 제 어미의 눈에서 낯선 빛을 발견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그는 이미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그려보았고, 그 상상만으로도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이아라는 그 말을 듣는 동안 저도 모르게 손끝으로 이불의 끝자락을 매만졌다. 얼굴도 모르는 여섯 살 아이가, 실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머리로는 이해되는데도 가슴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낯설게 밀려왔다. 그 낯섦이 부끄러워, 그녀는 애써 표정을 고르게 만들었다.
선우진은 몸을 돌려 방을 나서기 전, 문가에 서 있던 하녀에게 짧게 지시를 내렸다. 하녀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그의 말을 받았는데, 그 몸짓에는 오래 손발을 맞춰온 사람들 사이의 익숙한 리듬이 배어 있었다.
"당분간 이 방 문은 밖에서만 열도록. 부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진, 혼자 나가시게 하지 마시오."
그 말이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이아라의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회복을 위한 조치처럼 들리는 그 한 문장이, 사실은 문이 밖에서만 열린다는 뜻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창문 쪽을 살폈고, 두꺼운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빛의 색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고, 그 소리의 끝에는 자물쇠가 걸리는 듯한 짧은 쇳소리가 뒤따랐다.
이아라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나무향이 남은 자리에는 다시 약초 냄새가 스며들었고, 그 익숙한 냄새가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잔인하게 확인시켜주는 것 같았다.
'회복이 아니라, 감금이잖아.'
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녀는 이불을 밀치고 몸을 반쯤 일으켜, 조심스럽게 문가로 다가갔다. 손잡이는 차가웠고, 힘을 주어 당겨보아도 아주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저 자신의 숨소리만이 텅 빈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