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기억, 진짜 안주인

3화

며칠이 지나는 동안, 이아라는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이 정확히 어디까지인지를 조용히 지도로 그리듯 파악해나갔다. 방문은 여전히 밖에서만 열렸고, 하녀들은 그녀가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방 밖을 살피는 습관을 보였는데, 그 표정 하나하나가 이 저택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특수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말해주는 듯했다. '감시받고 있다는 걸 감시받는 사람만 모르게 하는 방식이구나.' 라라의 기억이 조언하듯 스며들었다. 이런 구조는 게임 속 배드엔딩 루트에서 자주 등장하던 패턴이었고, 대개 여주인공이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지내다가 뒤늦게 파국을 맞이하는 식으로 흘러갔었다. 물을 가져다주는 하녀의 손목에 걸린 얇은 팔찌 하나까지도, 이아라는 눈여겨보게 되었다. 저 팔찌가 하인들 사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저택 안에서 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낯선 몸과 낯선 이름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은 넓고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 끝에는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담이 둘러져 있었고, 정원 한편에는 문이 굳게 잠긴 작은 별채 하나가 이질적으로 서 있었다. 그 별채를 처음 발견한 날, 이아라는 자신도 모르게 창가에 오래 서서 그 건물을 바라보았는데, 나무판을 덧대어 완전히 막아버린 창문이 마치 무언가를 세상으로부터 숨기려는 듯처럼 보여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별채로 이어지는 오솔길에는 잡초 하나 없이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는데, 그 지나친 정갈함이 오히려 이질감을 더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면 저렇게 신경 써서 관리할 이유가 없을 텐데, 그렇다고 사람이 살고 있다면 창문을 저렇게까지 막아둘 이유도 없었다. 이아라는 그 모순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저택 안에 자신이 아직 모르는 규칙이 하나 더 숨어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러던 어느 오후, 방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녀들의 조심스러운 발소리와는 전혀 다른, 팔짝팔짝 뛰는 듯한 리듬이었다. 그 발소리만으로도 이아라는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이 이 저택의 다른 이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문틈으로 작은 얼굴이 빼꼼 들어왔다. 검은 눈동자와 동그란 코, 아버지를 닮은 듯하면서도 훨씬 부드러운 인상의 아이였다. 아이는 문고리를 붙잡은 채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엄마, 진짜 나 몰라?" 조심스레 던진 그 물음에, 이아라는 가슴 한켠이 저릿하게 눌리는 것을 느꼈다. 게임 속에서 그저 배경으로만 존재하던 캐릭터가, 지금 이렇게 눈앞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 '이 아이한테는 내가 정말 엄마구나.' 그 생각이 들자 목덜미 안쪽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게임 설정 속 조연이라는 인식과, 지금 눈앞에서 떨고 있는 이 작은 생명체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아라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라온이구나." 이름을 부르자 아이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그 반응을 보고서야 이아라는, 자신이 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가 조금 나아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라온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마치 잘못 들은 게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작은 발걸음으로 성큼 다가와서는, 침대 곁으로 다가와 손끝으로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마치 확인하듯 몇 번이나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고, 그 눈빛 속에서 이아라는 순수한 그리움과 불안이 뒤섞인 감정을 읽어냈다. "진짜 나 알아보는 거야?" 라온이 재차 물었다. 그 물음에는 확인이라기보다는 애원 같은 것이 섞여 있는 듯했다. 이아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머리카락이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그 감촉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을 붙잡았다. "아빠가 그랬어. 엄마가 아파서 우리를 잠깐 못 알아볼 수도 있다고." 조그맣게 덧붙이는 말에, 이아라는 문득 선우진이 아들에게 어떤 식으로 상황을 설명했을지가 궁금해졌다. 그 설명 안에 어떤 온도가 담겨 있었을지, 냉정한 남자로만 기억하던 인물의 또 다른 얼굴이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라고 했어?" 이아라가 되묻자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누나도 있어. 근데 누나는 안 와. 아빠가 오지 말라고 했대." 그 말을 들은 이아라의 속에서 무언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라온에게는 문을 열어준 것이, 그 위의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닫혀 있다는 뜻이었다. 왜 유독 라온만 이 방에 들어오는 걸 허락받았을까. 그 이유를 헤아려보려 했지만 답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라온이 방을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아라는 복도 쪽에서 낮게 억누른 목소리가 새어 들어오는 것을 들었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선우진이 한 하인을 상대로 나누는 대화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별채 근처엔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라 일렀을 텐데." 낮고 서늘한 그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훨씬 짙은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정원사가 잠시 물을 주려…" "핑계는 필요 없네. 다음에도 같은 일이 생기면, 이 저택에 그 사람 자리는 없을 걸세." 말끝이 칼처럼 잘려나가는 그 어조에, 이아라는 방 안에서도 숨을 죽였다. 문틈 사이로 스치는 선우진의 옆모습이 언뜻 보였는데,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보다 훨씬 굳어 있는 표정이었다.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흔치 않다는 걸, 며칠 사이 지켜본 것만으로도 이아라는 알 수 있었다. 별채라는 단어와, 그것을 둘러싼 이 지나친 경계심이 마음에 걸렸다. '저 안에 뭐가 있는 거지.' 단순한 창고나 별당이라면 저렇게까지 사람을 위협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라라의 기억 속에서도 이 저택에 그런 공간이 있었다는 설정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게임에서 다루지 않은 사각지대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도 이아라는 한참을 문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있었다. 정원사가 물을 주려 했다는 그 대답이, 사실은 얼마나 단순한 이유였는지를 생각하면, 선우진의 반응은 지나치게 과했다. 물을 주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공간이라면, 저 별채 안에는 식물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그 생각이 들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밤이 깊어진 뒤에도 이아라는 잠들지 못한 채 천장을 바라보며, 자신이 지금 발을 들인 이 이야기가 게임의 그것과 얼마나 다르게, 혹은 얼마나 똑같이 흘러갈지를 가늠해보았다. 라온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누나는 안 온다고 했던 그 말, 아빠가 오지 말라고 했다는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이 저택 안에 자신이 아직 만나지 못한 또 다른 아이가 있고, 그 아이는 왜 자신을 만나러 오지 못하는 것일까. 별채와 그 아이가, 어쩌면 서로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이아라는 이불을 움켜쥔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답은 나오지 않았고, 다만 별채의 막힌 창문 이미지만이 눈앞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던 얼굴 모를 딸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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