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던 중이었다. 갑자기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빗을 놓쳤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최은비가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았다. 손바닥의 온기가 어깨를 통해 전해졌지만, 나는 그것조차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낯선 장면이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좁은 궁의 복도. 대리석 바닥에 발소리가 부딪혀 되울렸다. 차가운 눈빛의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동자 색깔까지도 선명했다. 텅 빈 편지 상자, 그 안에 쌓인 먼지 한 겹까지도 눈에 담겼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괜찮다고 했어.'
나는 그런 곳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목소리를 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 장면들이 마치 내가 직접 겪은 일처럼 생생했다. 복도에서 나던 차가운 공기 냄새, 손끝에 스치던 편지 상자의 나무 감촉. 하나도 빠짐없이 남았다.
"아가씨? 아가씨!"
최은비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는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을 붙잡았다.
"다인아, 무슨 일이니."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나는 떨리는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애써 숨을 골랐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어지러웠어요."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이마를 짚었다. 손이 서늘했다.
"요즘 부쩍 안색이 안 좋구나. 의원을 부를까?"
"괜찮아요."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스스로도 놀랐다. 방금 머릿속에서 봤던 그 여자가 했던 말과 똑같은 어조였다. 억양까지 똑같았다는 게 이상했다.
한도현 남작가의 딸로 태어난 지 열여덟 해. 나는 아버지의 금융업을 도우며 숫자와 계약서 속에서 살아왔다. 채권자의 신용을 계산하고, 이자율을 따지고, 담보 목록을 정리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근거 없는 두려움이나 환상을 믿는 성격도 아니었다. 아버지조차 나를 두고 "너는 장부 없이는 잠도 못 잘 아이"라고 웃으며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요 며칠, 낯선 기억들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궁궐의 복도, 왕의 무표정한 얼굴, 서신이 오지 않는 편지 상자. 심지어 어제는 정원에서 누군가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장면까지 스쳤다. 나는 그런 곳에 가 본 적이 없는데도, 그 기억들은 마치 내 것처럼 선명했다. 찻잔의 무늬, 상대의 손가락 마디까지 기억이 났다.
'미친 게 아닐까.'
그 생각을 한 것만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미친 사람의 사고는 이렇게 논리적이지 않다. 미친 사람이라면 지금처럼 손을 떨면서도 원인을 분석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매번 상황을 재구성하려고 애썼다. 이 기억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어떤 상황에서 더 강하게 나타나는지를 하나씩 기록해 보기로 했다. 감정보다는 자료가 먼저였다.
그날 밤, 나는 방문을 잠그고 노트를 펼쳤다. 촛불 하나만 켜 두었다. 혹시라도 누가 들여다볼까 싶어서였다.
첫 번째 기억: 열흘 전, 목욕 중 갑자기 떠오름. 왕궁의 정원. 붉은 장미와 흰 돌길.
두 번째 기억: 사흘 전, 식사 중. 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감. 표정이 없었음.
세 번째 기억: 오늘 아침, 거울 앞에서. 편지 상자와 백작가. 목소리 하나.
공통점을 찾으려 했지만 뚜렷한 규칙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도, 장소도, 계기도 제각각이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게 있었다. 그 기억 속의 여자는 나와 이름이 달랐다. 강서윤.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또렷하게 울렸다. 마치 누군가 귓가에 대고 또박또박 발음해 준 것처럼.
'강서윤이 누구지.'
나는 그 이름을 노트에 적어 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글자를 눈으로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낯설지 않다는 감각만이 남았다.
최은비가 방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아가씨, 뭐 하고 계세요?"
나는 얼른 노트를 덮고 촛불을 손으로 가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최은비는 문틈으로 살짝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음, 그, 그러니까… 아버님께서 아가씨를 찾으세요. 내일 자선 행사에 함께 가시자고요."
"자선 행사?"
"예. 남작 부인들 모임이라는데, 이번엔 궁에서도 귀한 분이 오신다고… 아가씨도 예를 갖추고 오셔야 한대요. 옷도 새로 맞추셔야 하고요."
나는 노트를 서랍에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갈게."
"근데 아가씨, 진짜로 괜찮으신 거 맞아요? 아까 낮에도 그렇고, 요즘 부쩍 이상하시잖아요!"
최은비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걱정과 서운함이 뒤섞인 어조였다. 나는 그 애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서랍을 마저 닫았다.
"괜찮대도."
"음… 알겠어요. 그럼 안 물어볼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최은비는 문을 닫고 나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못 본 척했다.
최은비가 나가고 나서도 나는 한참 동안 서랍 속 노트를 바라보았다. 강서윤이라는 이름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그 이름이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까. 마치 내가 그 이름으로 살았던 것처럼.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이 유난히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별빛조차 흐릿했다. 나는 촛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으면 또 그 낯선 복도가 보일까 봐, 나는 오랫동안 눈을 뜬 채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이면 궁에서 온 귀한 사람을 만난다고 했다. 그 순간, 왜인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