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거울에 갇힌 후궁

2화

책봉식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몸단장을 하는 동안 상궁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첫 번째 후궁의 예복을 입는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옷이 얼마나 오래 내 것일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부로 첫 번째라는 말이 무의미해지겠지.' 거울 속의 내 얼굴은 담담했다. 반년 전, 이 자리에 처음 앉았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무뎌졌다. 그때는 매일이 살얼음판이었는데, 지금은 발밑이 무너져도 어쩐지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책봉식장에 들어서서 서열대로 맨 앞줄에 앉았다. 형식적으로나마 첫 번째 후궁의 자리는 아직 내 것이었다. 좌우로 다른 후궁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궁금해하는 눈, 동정하는 눈, 은근히 고소해하는 눈. 나는 그 시선들을 하나하나 세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문이 열렸다. 유하은이 들어왔을 때, 나는 잠깐 숨을 멈췄다. 은발이었다. 빛을 받으면 거의 하얗게 보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흘러내렸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끝이 잔물결처럼 흔들렸다. 피부는 백옥처럼 티 없이 맑았고, 옷깃 사이로 드러난 목선조차 인위적으로 다듬은 조각 같았다. 인형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주변에서 낮은 감탄이 새어 나왔다. 나조차 시선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이헌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평소 무표정하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고, 입가에는 억지로 감춘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눈이 유하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저게 총애구나.' 반년 동안 내가 받아 보지 못한 그 눈빛을, 유하은은 첫 만남에서 받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책봉식이 진행되는 내내, 나는 형식적인 절차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절을 하고, 술잔을 받고, 다시 절을 하고. 몸에 익은 동작들을 반복하는 동안 머릿속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이제 진짜로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겠다.' 그 생각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책봉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질 때, 유하은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예의를 차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어색하고 낯선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도 보였다. '긴장한 건가.' 새로 들어온 후궁이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시선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알 수 없는 감각이 등줄기를 스쳤다. '어디서 본 사람 같은데.'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은발도, 저 인형 같은 외모도 낯설기 짝이 없었다. 이 나라에서 저런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저 눈빛이 나를 바라보는 방식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에 마주쳤던 사람을 다시 보는 것 같은 기분.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유하은은 이미 상궁들에게 둘러싸여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은발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착각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접었다. 살면서 낯선 사람에게서 기시감을 느끼는 일은 종종 있으니까. 사람의 얼굴을 너무 많이 본 탓일 수도 있고, 혹은 단순히 오늘 하루가 유난히 피곤했던 탓일 수도 있었다. 처소로 돌아오는 길, 궁녀들이 조용히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께서 저렇게 좋아하시는 얼굴은 처음 봤어요." "그러게, 첫날부터 저 정도면……" 말은 끝맺지 못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다 알 수 있었다. 나는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상궁이 조심스럽게 내 방에 들어와 말했다. "마님, 이제 서열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유 후궁께서 폐하의 총애를 받으시니, 앞으로 마님께서는……" 상궁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운 걱정이 배어 있었다. 마치 내가 크게 상심할까 봐 미리 대비하는 듯한 어조였다. "괜찮아." 상궁이 눈을 크게 떴다. "예? 하지만……" "괜찮다고 했어." 말을 끊었다. 상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대신 나를 안타깝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이었다. 정말로 괜찮았다. 이헌의 관심이 완전히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간다면, 나는 오히려 정치적 부담에서 벗어나는 셈이었다. 왕비의 견제도, 왕의 시험도, 이제는 유하은이 대신 받게 될 테니까. 반년 동안 내가 감당했던 그 모든 시선과 압박이, 이제는 은발의 그녀에게로 옮겨 갈 것이다. '생존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총애를 받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은 아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는 눈에 띄는 채로 살아남아야 했으니, 지금부터는 반대의 전략을 쓸 수 있었다. '조용히,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그렇게 지낼 수만 있다면 이보다 편한 삶도 없을 것이다. 상궁이 물러가고 방에 홀로 남았을 때,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오늘 낮에 느꼈던 이상한 기시감을 다시 떠올렸다. 그 눈빛. 나를 바라보던 그 표정.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왜 그렇게 슬픈 눈으로 나를 봤을까. 놀란 것치고는 지나치게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단순한 낯가림이나 예의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게였다. '혹시 나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이제 막 궁에 들어온 후궁이 나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인데.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그날 밤 끝내 찾지 못했다. 창밖으로 바람이 스쳐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감았지만, 은빛 머리카락과 그 슬픈 눈빛이 자꾸만 눈앞에 떠올랐다. 잠은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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