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아침, 저택 전체가 이미 소문으로 들끓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시녀가 커튼을 걷으면서부터 뭔가 이상했다. 평소라면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하고 끝날 인사가, 오늘은 자꾸 말을 흐렸다.
"저, 아가씨. 어제……."
"됐어. 세숫물 가져와."
말을 끊어버렸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하려는지 뻔했으니까.
복도로 나가자 하녀들이 벽에 붙어서 소곤거리고 있었다. 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이는데, 그 반응이 더 웃겼다.
'다 들리는데 뭘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해.'
목소리를 낮춘다고 안 들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낮춘 목소리가 복도 대리석에 부딪혀 더 또렷하게 울렸다. "그 남궁 아가씨 말이야……", "진 후작가 공자님이……" 하는 단어들이 파편처럼 귀에 박혔다.
나는 못 들은 척,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지나쳤다. 등 뒤에서 다시 소곤거림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이럴 때 돌아보면 지는 거다.
식당에 들어서자 언니 강해은이 먼저 앉아 있었다. 금발에 에메랄드빛 눈을 가진 언니는, 화가 났는지 걱정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와 언니의 금발을 비추는데, 그 그림 같은 광경과 대비되는 살벌한 표정이 묘하게 부조화스러웠다.
"앉아."
언니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 나는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식탁 위에 놓인 홍차 잔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손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제 연회에서 있었던 일, 벌써 세 갈래로 소문이 돌고 있어."
언니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첫 번째, 네가 남궁서은과 자매지간이라 착각을 당했다는 소문. 두 번째, 네가 몰래 진 후작가와 혼약을 진행했다가 들켜서 파혼당했다는 소문. 세 번째……"
언니가 잠깐 말을 멈췄다.
'또 뭐가 있는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진하람 공자님이 사실은 너를 좋아했는데, 커밍아웃으로 그 마음을 감춘 거라는 소문."
"……뭐라고?"
나는 순간 사레가 들릴 뻔했다. 마시지도 않은 홍차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는 게 더 웃긴 일이지만, 그만큼 충격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사교계가 그렇지, 뭐. 사실 여부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기는 곳이잖아."
언니는 팔짱을 풀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래서,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한테 처음부터 얘기해봐."
'이럴 때 언니만큼 든든한 사람이 없긴 하지.'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했다. 벽의 꽃 자리에서 시선을 느낀 것부터, 진하람이 다가와 남궁서은이라고 부르며 파혼을 선언한 것, 그리고 진 후작부인이 와서 착오였다고 정정한 것, 마지막으로 진하람이 자신은 남성을 좋아한다고 밝힌 것까지.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다시 정리가 안 됐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사건이었다. 마치 남의 연애 소설 줄거리를 읽어주는 것 같았다.
언니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표정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 손끝으로 찻잔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며 듣기만 했다. 다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니까, 걔가 자기 입으로 그 자리에서 게이 선언을 했다는 거지."
"……맞아."
"그것도 자기 실수를 덮으려고?"
"그런 것 같아."
언니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상하네."
"뭐가?"
"그 정도 실수는 그냥 조용히 정정하고 사과하면 끝날 일이야. 굳이 그렇게까지 큰 폭탄을 던질 필요가 없었어."
'그렇긴 하지, 나도 그게 이상했어.'
사실 어젯밤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냥 "죄송합니다, 착오였습니다" 하고 물러나면 될 일이었는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언니가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쪽 집안에서 뭔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 수도 있고."
"큰 그림이라니?"
"몰라. 그냥 느낌이 그래. 사교계에서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집안이 저렇게 어설프게 대응할 리가 없거든."
"어쨋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언니의 목소리가 갑자기 단단해졌다.
"지금 사교계에서 네 이름이 어떻게 오르내리고 있는지가 문제야. 조용히 있으면 오히려 더 나쁜 방향으로 소문이 굳어질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사실 어제부터 계속 고민하던 문제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조용히 지내면 이 일이 잠잠해질까 싶었는데, 언니 말을 들으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일단 내가 정보를 좀 모아볼게. 진 후작가에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려는지, 남궁 백작가 쪽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언니는 벌써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했다. 손가락을 접어가며 뭔가를 헤아리는 모습이 꼭 전략을 짜는 장군 같았다.
"내가 아는 사람들 몇 명한테 연락해볼게. 이런 일은 정확한 정보가 제일 중요해. 소문만 듣고 움직이면 오히려 손해 봐."
"그리고 너는."
언니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분간 사교 모임에 나갈 때마다 흔들리지 마.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표정 관리해. 네가 흔들리는 순간 소문은 사실처럼 굳어져."
'말이야 쉽지.'
사람들 앞에서 태연한 척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언니는 모르는 걸까. 아니, 알 거다. 언니도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많은 시선을 받아온 사람이니까.
하지만 언니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어제 연회장에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사람들의 시선이 등에 꽂히는 순간, 표정 하나로 그 모든 시선의 방향이 바뀐다는 걸.
"근데 언니."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그냥 조용히 물러나 있으면 안 돼? 굳이 사교계에 남아서 이 소문을 정면으로 마주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몸이 안 좋다고 하고 몇 달 정도 저택에 있으면……."
언니는 잠깐 나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서은아,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조용히 사라지면 그게 오히려 자백처럼 보여."
"자백?"
"그 소문 중에 하나는 맞다는 자백. 남자한테 버림받아서 부끄러워서 도망갔다는 식으로."
그 말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까지 생각 못 했는데.'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도망치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이 세계는 왜 이렇게 사람 하나를 가만두질 않는 걸까.
"아버지 상태도 지금 안 좋으신데, 이런 소문이 겹치면 백작가 전체 위신에도 영향이 갈 거야."
언니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는 언니도 늘 이렇게 무거워졌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순간적으로 다른 생각들이 다 밀려나고, 그 자리에 죄책감 비슷한 게 들어앉았다.
"그럼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정면으로 부딪혀야지. 조용히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당당하게. 우아하게."
'우아하게라니,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닌데.'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우아함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 상태로는 우아함보다 생존이 먼저였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연습이라도 좀 해야 하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언니가 피식 웃었다.
"연습할 시간이 어딨어. 그냥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 다행히 넌 원래 표정이 없는 편이잖아. 그게 지금은 도움이 될 거야."
'그게 위로야, 아니면 디스야.'
식당 문이 열리고 하녀 하나가 들어와 언니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언니가 그것을 펼쳐 읽더니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짧은 순간의 변화가 심상치 않아서,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뭐야?"
"진 후작가에서 보낸 초청장이야."
언니가 쪽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다음 주에 있을 다과회에 너를 정식으로 초대한대. 진 후작부인 명의로."
'진짜 뭘 하려는 거야, 그 집안.'
나는 쪽지를 받아 들고 그 안의 글씨를 천천히 읽었다. 정중한 문체였지만, 그 안에 담긴 의도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손글씨는 유려했고, 문장 하나하나가 격식에 맞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 지나치게 완벽한 초대장이었다.
"이거 받아도 되는 거야?"
"안 받으면 더 이상해져. 이미 사교계 전체가 이 일을 주목하고 있는데, 진 후작가에서 보낸 초대를 무시하면 그것도 소문의 재료가 될 거야."
"그럼 가야 한다는 거네."
"가야지."
언니가 쪽지를 다시 받아 들고 손끝으로 매만졌다.
"근데 이상한 게, 다과회는 보통 여러 명을 함께 초대해. 그런데 이건……"
언니가 쪽지의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너 혼자만 초청했어."
그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이 초청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소용돌이의 시작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 일은 절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