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진 후작부인이 내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소문대로 미인이었지만, 그 아름다움보다 먼저 느껴지는 건 서늘한 위압감이었다. 등허리가 곧고, 걸음걸이 하나에도 격식이 배어 있었다. 오래 갈고 닦은 사람 특유의 티가 났다.
'역시 아무나 후작부인 하는 게 아니구나.'
"강서은 영애."
그녀가 내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
'다행이다, 이 사람은 이름은 제대로 아네.'
아까 그 무례한 하객들과는 격이 달랐다. 적어도 남의 이름 하나는 제대로 외워서 온 거다.
"방금 있었던 일은, 저희 아들의 완전한 착오였습니다."
부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날이 서 있었다. 착오. 그 두 글자가 유독 또렷하게 들렸다.
"착오라니……."
내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사람들 앞에서 파혼당한 지 채 오 분도 안 됐는데, 이번엔 그게 착오였다는 통보를 받는 기분은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착오면 착오지 뭘 그렇게 무겁게 말해요.'
"진 후작가와 혼약이 논의된 상대는 남궁 백작가의 서은 영애였습니다. 이름이 같아 발생한 오해였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동명이인이었다는 거네.'
허탈함과 안도가 동시에 밀려왔다. 남궁서은.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기도 했다. 백작가 영애면 나랑 신분도 안 맞고, 애초에 얼굴 한번 마주친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 하나 때문에 내가 오늘 저 많은 눈들 앞에서 개차반 취급을 당했다는 거다.
'와, 진짜 어이없네.'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진하람이 입을 열었다.
"제 잘못입니다."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교계 최고의 미청년이,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거 봐, 이렇게 나오면 상황이 더 이상해지잖아.'
주변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 부채 접는 소리, 낮은 탄식 소리가 동시에 났다. 사람들이 서로 팔꿈치를 툭툭 치며 귓속말을 주고받는 게 시야 끝에서도 보였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몰려들었다. 이번엔 흥미가 아니라 혼란이었다.
"공자님, 그러시면……."
누군가 조심스레 물었다.
"진 영애께 실례를 저지른 건 사실입니다. 그 자리에서 마땅히 정정해야 했는데, 하지 못했습니다."
진하람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뭔가 결의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보고 순간 불안해졌다.
'설마 또 뭔 짓 하려는 거 아니지.'
이 남자, 아까부터 뭔가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착오였다고 사과하는 걸로 끝날 사람 표정이 아니었다.
"제가 그 자리에서 강 영애를 지목한 것은, 남궁 영애와의 혼약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내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예감이라는 게 이럴 때 오는구나 싶었다.
"저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을 좋아합니다."
연회장 전체가 완전히 정지했다.
'……뭐?'
나는 그 순간 내 표정 관리에 완전히 실패했을 것이다. 눈이 커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입도 살짝 벌어졌던 것 같다. 부채로 얼굴을 가릴 새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더 극적이었다. 몇몇은 입을 틀어막았고, 몇몇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말도 못 잇는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는 마시던 샴페인 잔을 든 채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악단의 연주 소리만이 그 정적을 어색하게 채우고 있었다.
"하람."
부인이 나지막이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놀란 기색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났다. 방금까지의 그 서늘한 위압감이 순간 흔들리는 게 보였다. 후작부인도 이건 몰랐던 거다.
'헐, 어머니도 모르는 폭탄이었어?'
"어머니, 이제라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진하람은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남궁 영애와의 혼약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아까 강 영애를 잘못 지목한 건 순전히 제 실수지만, 혼약을 파기하겠다는 마음 자체는 진심이었습니다."
'와, 이 사람 지금 진짜로 이 판을 이렇게 만드는 거야?'
나는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가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착오로 사람 하나 파혼시켜놓고, 그걸 정정하는 자리에서 자기 성적 지향까지 커밍아웃할 필요가 있었나. 이건 누가 봐도 계산된 폭로였다. 그런데 뭘 위한 계산인지가 안 보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순간, 사교계 전체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
내일 아침이면 이 자리에 있던 사람 숫자만큼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질 것이다. 아니, 이 자리에 없던 사람들 귀에까지도 다 들어갈 거다. 사교계라는 곳이 그런 곳이었다.
'그럼 나는 뭐가 되는 거지.'
조금 전까지는 착각으로 파혼당한 불쌍한 영애였는데, 이제는 그 착각의 한가운데서 진짜 이야깃거리가 되어버린 사람이 되어 있었다. 파혼당한 영애에서, 사교계 최고 미청년 커밍아웃 사건의 조연으로 급승격한 셈이었다.
'승격이 아니라 강등인가.'
부인이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미안함과 계산이 동시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여러 생각을 정리한 눈빛이었다. 아들 문제로 당황한 것도 잠깐, 이 여자는 이미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후작부인이라는 게 저런 거구나. 아들이 폭탄 던져도 삼 초 안에 다음 수를 짠다.'
"강 영애, 이번 일로 불편을 끼친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저희 쪽에서 적절한 후속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후속 조치라니, 그게 뭔데.'
돈일까. 아니면 다른 뭔가일까. 머릿속으로 온갖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나는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목이 뻣뻣하게 굳어서 그 이상은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진하람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눈빛에서 나는 뭔가 미안함 같은 걸 읽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상황을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결연함도 함께 있었다. 그 눈은 마치 나한테 뭔가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게 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잘못 지목한 것에 대한 사과라면 이 정도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그냥 "착오였습니다, 정정합니다" 한마디로도 충분했을 텐데. 그런데 그는 스스로 오명을 뒤집어쓰는 방식을 선택했다. 사교계에서 저 정체성이 어떤 무게를 갖는지 모를 리 없는 사람이 저렇게 대놓고 말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뭔가 있어. 분명히 뭔가 있는데.'
연회장은 여전히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진하람의 커밍아웃이라는 폭탄이 던져진 뒤였다. 사람들은 이제 나에 대한 관심보다 그 사실 자체에 더 몰두하는 듯했다. 몇몇 귀족 영식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옮기기까지 했다.
'그나마 다행인가.'
이 정도면 조용히 빠져나갈 틈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런데 그 생각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럼 강 영애는 대체 무슨 일로 파혼을 당한 거야?"
누군가의 질문이 다시 웅성거림을 뚫고 나왔다.
"착각이라면서 왜 아직 저기 서 있는 거지?"
"불쌍해서 그런가."
'……어, 이거 방향이 이상해지는데.'
누군가는 대놓고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기까지 했다. 그 손끝이 얼굴에 닿는 것도 아닌데, 등에 식은땀이 확 돋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몰렸다. 이번엔 남궁서은과의 착각, 그리고 진하람의 갑작스러운 커밍아웃까지 겹쳐진 채였다. 두 개의 큼지막한 이야깃거리가 나를 중심으로 겹쳐지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예감했다.
오늘 밤이 지나면, 사교계에서 내 이름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오르내릴 것이다.
좋은 쪽으로는 절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리고 그 확신은, 부인의 다음 한마디로 순식간에 현실이 되었다.
"강 영애, 잠시 저와 함께 자리를 옮기시겠습니까."
'……네?'
이 많은 눈 앞에서, 대체 어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