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파혼녀, 진짜 마법사

2화

연회장의 샹들리에는 지나치게 밝았다. 나는 그 밝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자리일수록 조명은 좀 어둑해야 하는 법인데, 오늘의 야회는 유난히 화려하게 불을 밝혀 놓아서 벽에 걸린 그림 속 인물들의 눈까지 다 보일 지경이었다. '뭐 이렇게 밝아. 뭐 감출 것도 없나 보지.' 나는 강 백작가의 둘째 딸, 강서은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건 순전히 어머니의 강권 때문이었다. 사교계 얼굴 좀 비추라고, 혼기 찬 딸이 방구석에만 있으면 어떡하냐고 어제 아침부터 성화를 부리셨던 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지못해 드레스를 걸치고, 마지못해 미소를 걸치고, 마지못해 이 화려한 감옥 같은 연회장 한구석에 서 있었다. '적당히 얼굴 비추고 일찍 빠져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손에 든 부채를 팔락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악단의 연주가 세 번째 곡으로 넘어갈 무렵, 연회장 입구 쪽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 웅성거림은 물결처럼 홀 전체로 퍼져 나갔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 방향을 흘깃 쳐다봤다가, 곧 시선을 거뒀다. 어느 유력 가문의 자제가 등장했겠거니 싶었다. 이런 자리에서 사람들이 저렇게 파도처럼 갈라지는 건 대개 그런 이유였으니까. 그런데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면서, 그 파도가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쪽으로 오는데.' 나는 자연스럽게 부채로 얼굴을 살짝 가리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이럴 땐 눈에 안 띄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데 물러선 만큼, 딱 그만큼 거리가 다시 좁혀졌다. 발소리가 점점 뚜렷해졌다. 구두 뒤축이 대리석 바닥을 딱, 딱,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는 건, 주변이 그만큼 조용해졌다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진하람은 내 앞에 정확히 세 걸음을 두고 멈췄다. 연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음악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는데도,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기분이었다. '뭐야, 왜 다들 숨을 참고 있어.' 진하람. 진 후작가의 장남이자 이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그 얼굴. 나도 소문으로는 익히 들었다. 냉정하고 말이 없으며, 사교 모임에 잘 나타나지도 않는다던 그 사람이 지금 내 앞에, 그것도 이렇게 정면으로 서 있었다. '왜 하필 나야.' 그의 물색 눈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뭔가에 단단히 각오한 눈빛이었다. "남궁서은."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어.' 순간 이해가 안 됐다. 남궁서은이라니, 내 이름은 강서은인데. 성도 다르고 이름 한 글자도 다른데, 저게 어떻게 나올 수가 있지. '잘못 부른 건가.' 그렇게 생각할 틈도 없이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이 혼약을 파기하겠습니다." 연회장 전체가 얼어붙었다. '뭐라고.' 나는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내가 혼약이라니. 나는 진하람과 만난 적도, 이름을 나눈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우리 집안이 진 후작가와 무슨 혼약을 진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었다. 어머니가 나한테 숨기고 뭘 진행했을 리도 없었다. 우리 집이 그럴 만한 급도 아니었고. '이거 완전히 사람 잘못 본 거잖아.' 그런데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숨죽인 채, 이 상황을 진짜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미 옆 사람에게 귀엣말을 건네고 있었고, 그 귀엣말은 다시 옆으로, 또 옆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저기요, 저 사람들아, 지금 이거 오해거든요.' 나는 속으로 소리쳤지만, 정작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진하람 공자님, 지금……." 나는 입을 열려 했다. 정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다고, 저는 강서은이라고. 이름 하나가 다르지 않느냐고, 얼굴도 처음 보는 사이가 아니냐고. 그런데 목이 굳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손끝이 떨렸다. 부채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스르륵 풀렸다. 손바닥에 땀이 배는 게 느껴졌다. 이 화려한 드레스 속에서 나는 그저 벌벌 떠는 한 마리 짐승 같았다. "당신과의 혼약, 나는 처음부터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연회장 전체가 들으라는 듯한 톤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혼약 자체가 없다고요.' 나는 그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목구멍 어디쯤인가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꿈속에서 말을 하려는데 소리가 안 나오는 것처럼.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히지요. 나는 이 혼약을 파기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당신과 어떤 관계로도 얽히지 않겠습니다." '……잠깐만.'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게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인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나를 향해 꽂혔다. 누군가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누군가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뒤편 어딘가에서 부채로 입을 가린 귀부인이 옆 사람과 뭔가를 소곤거리는 게 보였다. 저 소곤거림이 뭔지 알 것 같아서 더 소름이 끼쳤다. '설마, 진짜로 나를 그 남궁서은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럴 리가. 나는 강 백작가의 강서은이었다. 남궁 백작가와는 인연조차 없었다. 남궁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있기나 한지도 가물가물했다. 그런데도 이 상황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마치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데, 나만 그 답을 모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는……" 겨우 입을 뗐지만, 그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목이 잠긴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 시선이 너무 많았다.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눈 앞에서 말을 더듬는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그림인지 나도 알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드레스 안쪽이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말을 해, 강서은. 사람 잘못 봤다고 말을 하라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표정 어디에도 '저 사람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의심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들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가 마침내 결말을 맺는 것처럼, 안타까워하거나 고소해하는 얼굴들뿐이었다.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 다들.' 진하람은 내 반응을 착각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의 표정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마치 내가 뭔가 반박이라도 할까 봐 경계하는 듯한, 혹은 내가 눈물이라도 흘릴까 봐 걱정하는 듯한 그런 흔들림이었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곧 다시 단단한 결의로 바뀌었다. "더 이상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발걸음 소리가 다시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며 멀어졌다. 딱, 딱, 딱. 그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데도 내 심장은 그 소리에 맞춰 점점 크게 뛰었다. 연회장은 완전히 정지된 것 같았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시선들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다음에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물을 흘릴지,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지, 다들 재미난 구경거리를 기다리듯 지켜보는 것 같았다. '……뭐지, 이게.'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방금 벌어진 일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손에 쥔 부채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몰랐다. 딸그락. 그 작은 소리가 이상하게도 크게 울렸다. 몇몇 사람의 시선이 그 소리를 따라 바닥으로, 다시 내 얼굴로 옮겨졌다. 나는 그 시선들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차가운 것도 아닌, 그냥 무겁고 끈적한 시선들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였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지만, 그 소리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군가는 내 이름을 언급하는 것 같았고, 또 누군가는 "저 아가씨가 그……"라고 말을 흐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뒷말이 뭔지, 이상하게도 궁금해지지 않았다. 궁금해하기도 전에 머릿속이 이미 새하얗게 지워져 있었으니까. 방금, 나는 사교계 전체가 보는 앞에서 파혼을 당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에게. 한 번도 성사된 적 없는 혼약을. '……이게 지금 실제로 일어난 일이야?' 부채를 주우려고 몸을 숙였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릎이 살짝 꺾이는 게 느껴졌고, 나는 그걸 겨우 버텨냈다. 이 자리에서 넘어지기까지 하면 정말로 오늘의 화제는 나로 완전히 도배될 것이다. '제발, 여기서 쓰러지지만은 말자.' 연회장의 시선들이 여전히 내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들 너머, 방금 등을 돌린 진하람이 걸어 나가던 문 쪽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실루엣이 보였다. '……또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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