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죽음은 예고 없이 왔다.
야근을 마치고 걷던 골목이었다. 발밑에서 자갈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늦은 밤 특유의 정적이 골목을 감싸고 있었다. 그 정적을 트럭 전조등이 찢었다. 눈앞이 하얗게 채워졌다. 그다음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다른 몸 안에 있었다.
천장이 낮았다. 나무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방이었다. 벽에는 세월의 흔적으로 얼룩진 자국이 번져 있었다. 향냄새가 코를 찔렀다. 약재 냄새도 섞여 있었다—쓴 풀 냄새와 단내가 뒤섞인, 죽음을 늦추려는 노력의 흔적이었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옆에서 가늘게 이어졌다.
고개를 돌렸다. 백발의 노인이 요 위에 누워 있었다. 살가죽이 뼈에 바짝 붙어 있었다. 눈빛이 흐렸다. 숨이 얕았다. 죽음이 가까운 얼굴이었다—병상에서 몇 번이나 봤던 그 얼굴이었다. 이번엔 내가 그 얼굴을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신후야."
노인이 내 이름을 불렀다. 신후. 내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몸의 이름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즉시 받아들였다—따질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의문을 품는 것은 사치였다.
"예, 사부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이 몸의 습관이었다. 나는 그것을 관찰해뒀다. 몸에 남은 기억과 새로 들어온 내 의식이 겹쳐 있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두 개의 필름이 한 화면에 겹쳐 돌아가는 느낌.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조차 낯선데, 입은 알아서 대답을 내놓았다.
노인은 손을 들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 떨림이 손목까지 올라와 팔 전체를 흔들었다. 그는 베개 밑에서 얇은 책자를 꺼냈다. 표지가 누런색이었다. 손을 대는 순간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시간이 겹겹이 쌓인 냄새였다.
"이것을..."
말이 끊겼다. 기침이 터졌다. 피가 조금 섞여 나왔다. 붉은 방울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 나는 저절로 몸을 일으켜 그를 받쳤다. 가벼웠다. 너무 가벼웠다. 성인 남자의 몸이라기엔 믿기지 않는 무게였다. 오랜 병마가 이 사람의 몸을 얼마나 깎아냈는지 손끝으로 느껴졌다.
"받아라."
노인이 책자를 내 손에 쥐여줬다. 힘이 없는데도 손끝은 완강했다. 손가락이 내 손목을 감싸며 놓지 않으려는 듯 잠시 힘을 줬다. 나는 받았다.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었지만 답은 없었다. 노인의 눈이 초점을 잃어갔다. 눈동자가 허공의 한 점에 고정된 채 흔들리지 않았다. 숨소리가 점점 길어졌다. 마지막 호흡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죽음을 지켜본 경험이 이 순간에도 도움이 됐다. 죽음은 늘 비슷한 속도로 다가온다. 숨과 숨 사이의 간격이 벌어지고, 그 간격이 곧 영원이 된다.
"배유를..."
마지막으로 나온 말이었다. 이름이었다. 그 뒤로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노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손이 내 손목에서 미끄러져 이불 위로 떨어졌다.
숨이 멈췄다.
나는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의 침묵이 무거웠다. 촛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이 이 방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정리가 필요했다. 나는 이 몸의 기억을 더듬었다. 청송파. 이름조차 초라한 문파였다. 산 하나를 겨우 지키는 작은 검문. 제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강호에서는 이름을 대면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의 문파였다. 이 노인은 현암도인, 전임 파주였다. 그리고 나는—유신후. 이 문파의 대사형.
대사형이라는 자리는 무겁지만 텅 비어 있었다. 문파에 남은 제자는 몇 되지 않았다. 실전 경험은 거의 없었다. 몸은 익힌 초식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기억은 서랍 속에 넣어둔 지 오래된 물건 같았다—꺼내면 쓸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손에 든 비급을 펼쳤다. 글자가 낯설었다. 그러나 읽을 수 있었다—이 몸의 학식이 도와줬다. 내용은 알 수 없는 부호와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무공서치고는 이상했다. 흔히 보던 초식의 배열도 아니었고, 호흡법을 설명하는 문장도 아니었다. 마지막 장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뜻을 이을 자에게."
뜻을 이을 자가 나인가. 확신이 없었다. 다만 이 책이 무언가의 열쇠라는 것은 분명했다—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힘으로 건넨 물건이 시시할 리 없었다. 손에 쥐고만 있어도 무게가 느껴졌다. 종이의 무게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무언가의 무게였다.
그리고 마지막 말. 배유.
이름 하나가 목에 걸린 가시 같았다. 이 몸의 기억을 다시 뒤졌다. 배유. 현암도인의 사제였던 자. 한때 문파의 이인자였다. 신념이 갈려 떠났다고 했다. 정확히 무엇이 갈렸는지는 기억이 흐릿했다—신후의 기억조차 이 부분에서는 조심스러운 듯 흐려져 있었다. 그 후로는 독사장의 고수로 강호에 이름을 떨쳤다.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자였다.
독사장이라는 이름 자체가 위협이었다. 사람을 스치듯 지나가며 독기만으로 목숨을 끊는다는 무공. 소문으로는 배유가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언급했을까.
답은 두 가지였다. 경고, 혹은 부탁. 어느 쪽이든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숨을 쥐어짜 내뱉을 정도의 이름이라면, 그 이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급했다. 계단을 밟는 소리가 아니라 뛰어오르는 소리였다. 문이 열렸다. 짧은 단발머리의 여인이 뛰어들어왔다. 명황색 수련복을 입고 있었다. 옷자락이 뛰어온 여파로 아직도 펄럭이고 있었다. 눈에는 이미 눈물이 차 있었다.
"사부님!"
서영이었다. 이 몸의 기억이 즉시 이름을 알려줬다. 서영. 문파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제자. 어릴 때부터 검을 잡았고, 손등에는 굳은살이 두껍게 박여 있었다.
그녀는 노인의 몸을 흔들었다.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이고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지만 몸은 흔들리는 대로 흔들릴 뿐이었다. 곧 그녀의 어깨가 무너졌다.
나는 그 순간에도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슬픔에 잠기기 전에 정리할 것이 있었다. 비급을 옷 안쪽으로 숨겼다. 손끝이 움직이는 속도가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때가 아니었다.
서영이 나를 올려다봤다. 눈이 붉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데도 그녀는 닦을 생각을 못 하는 듯했다.
"대사형. 사부님이..."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손짓이 자연스러웠다—몸이 알던 습관이었다. 신후라는 몸은 이런 순간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고생하셨소. 이제 편히 쉬시게 해드리자."
말은 그렇게 나왔다. 속으로는 다른 계산이 돌고 있었다. 문파를 지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이 비급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배유라는 이름의 무게를 가늠해야 한다. 이 작은 문파가 그 이름 하나에 통째로 흔들릴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창밖으로 바람이 지나갔다. 처마 끝 풍경이 흔들리며 낮게 울었다. 그 소리가 마치 경고처럼 들렸다. 나는 그 소리가 멈출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이 문파의, 이 몸의, 앞으로의 시간이 그 풍경 소리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아직 다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