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계 최강자의 서울 유람

1화

서울, 어느 폐공장 지대. 쿠구구- 철골 구조물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먼지가 걷히자 그 안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백무진. 검은 코트 자락에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끄, 끝났다고 생각하나?" 쓰러진 사내들 중 하나가 피 섞인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백무진은 대답 대신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바닥의 콘크리트가 갈라졌다. 콰직! 조직의 마지막 경비병이 무기를 들어보지도 못하고 튕겨나갔다. 벽에 부딪혀 그대로 미끄러져 내렸다. 움직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대마경의 기운을 가둘 수 있다고 여겼나." 백무진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쓰러진 사내가 뒷걸음질을 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건물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벌써 여기까지 왔나.' 백무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너진 지붕 틈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석 달 전, 그는 이런 힘을 쓸 생각조차 없었다. '석 달이라니.'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은 그의 인생 전체보다 무거웠다. 석 달 전. 인천 국제공항.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청년이 있었다. 키가 크고, 눈매가 날카로웠다. 행색은 수련자라기보다 여행객처럼 가벼웠다. 백무진이었다. 대마경에서 나고 자란 그는, 형 백강호가 유년기를 보낸 서울이 궁금했다. 형이 입에 달고 살던 그 도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형은 왜 이 도시 얘기만 나오면 그런 눈을 했을까.' 백무진은 캐리어 하나 없이 배낭만 멘 채 공항 로비를 지났다. 사람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아무도 그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했다. '재밌겠군.' 백무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대마경에서는 이미 오를 만한 경지를 다 오른 몸이었다. 이곳에서는 뭘 하든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날 오후. 백무진은 서울 강남 어느 은행 앞에 서 있었다. 유리로 된 높은 건물이 낯설었다. 간판의 글자들도,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이곳 사람들은 다 저렇게 빨리 걷나.' 백무진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낯설었다. '게임 같은 거지.' 그는 별생각 없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문이 스르륵 열리는 방식조차 신기했다. 안내원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저, 저기 손님. 무슨 일로..." "돈을 구경하러 왔다." 백무진의 대답은 짧고 단정했다. 안내원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옆의 동료 직원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상한 사람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은행 금고 쪽에서 경보가 울렸다. 날카로운 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다른 이의 침입이었다. 총을 든 강도 세 명이 창구 직원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다 죽여버릴 거야!" 손끝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직원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군가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 백무진은 그 광경을 무심히 바라봤다. '이것도 게임인가.'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바닥에 엎드리고 있는데, 그 혼자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가 천천히 걸어갔다. 발소리조차 여유로웠다. 강도 하나가 총구를 그에게 돌렸다. "뭐야, 넌! 너도 죽고 싶어?" 탕! 총성이 울렸다. 실내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탄환은 백무진의 손끝에서 멈춰 있었다. 손가락으로 집힌 채로. "...!" 강도의 눈이 흔들렸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장난감치고는 소리가 크군." 백무진은 탄환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딱, 하는 작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유독 크게 실내에 울렸다. 다음 순간 그의 손이 강도의 목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어, 어어...!" 강도는 발이 땅에서 떨어진 채 버둥거렸다. 목을 잡은 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남은 둘은 그 광경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총을 겨눌 생각도 하지 못했다. "너, 넌 대체 뭐야..." 남은 강도 중 하나가 뒷걸음질을 쳤다. 백무진은 그를 향해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가볍게 손목을 튕기자, 들려 있던 강도가 벽 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남은 둘은 그대로 무기를 놓고 바닥에 엎드렸다. 경찰이 도착한 건 그 직후였다. 사이렌이 은행 앞에 멈춰 서고, 순찰차 문이 열렸다. 중년의 남자가 먼저 내려섰다. 야간 순찰대장 강태석이었다. "상황 보고!" 강태석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오랜 형사 경력에서 나온 습관이었다. 뒤따르던 젊은 경관들이 총을 뽑아 들고 은행 안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은행 안으로 들어선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강도 셋을 한 손씩 붙잡고 있는 청년이었다. 바닥에는 구겨진 총 세 자루가 널브러져 있었다. 직원들은 아직도 겁에 질린 얼굴로 벽에 붙어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강태석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백무진은 그를 향해 강도들을 툭 내려놓듯 건넸다. 마치 짐짝을 옮기는 듯한 태도였다. "쓰레기 정리는 이쪽 담당인가." 강태석은 잠시 말을 잃었다. 청년의 태도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마치 이 모든 게 당연한 일처럼 굴고 있었다. 총알이 벽에 박혀 있는데도, 코트 자락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는 게 이상했다. '뭐 하는 놈이지, 이건.' 강태석은 수갑을 채우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부하 경관 하나가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저, 대장님. 저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신원 확인부터..." "일단 서로 데려간다." 강태석은 짧게 답하며 백무진을 살폈다. 청년은 순찰차에 오르라는 손짓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순순히 따랐다. 저항할 생각이 아예 없어 보였다. 그것도 이상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도망치거나, 아니면 흥분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강태석의 눈에 비친 백무진은 그저 지루한 얼굴이었다. 그날, 그는 백무진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자신의 가족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 아직은 전혀 알지 못했다. 순찰차가 은행 앞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강태석은 뒷자리에 앉은 청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평범한 인간이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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