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마을 어귀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뉘엿뉘엿 기울어 흙길 위로 붉은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먼지 섞인 바람이 서연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그녀의 시선을 붙든 것은 흙바닥에 널브러진 작고 마른 몸이었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앙상한 손목에는 오래된 상처 자국이 몇 줄이나 겹쳐 새겨져 있어서, 그것이 결코 평범한 아이가 지닐 수 있는 흔적이 아니라는 것을, 서연은 한눈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저 자국들은…….'
낯익은 통증이 자신의 손목께로 번지는 듯한 착각이 스치는 순간, 서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짧게 삼켰는데, 언젠가 자신도 저런 눈으로 세상을 올려다보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문득 가슴 밑바닥에서 떠올라 그녀를 흔들어놓았다.
"어디서 굴러온 애인지……."
"쯔쯔, 손목 좀 봐. 예사롭지 않은 애야."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낮게 수군거리며 아이를 힐끗거릴 뿐, 누구 하나 다가서지 않았고, 그저 멀찍이서 팔짱을 낀 채 구경하듯 바라보는 시선들만이 아이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는데, 그 무관심이 오히려 서연의 가슴을 더 세게 두드렸다.
서연은 그 시선들 사이를 가로질러 걸음을 옮겼고,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그 작은 몸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는데, 아이의 몸에서 느껴지는 오싹할 정도의 냉기와, 거의 잡히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숨결이 그녀의 손끝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서늘하게 얼려버리는 듯했다.
'이대로 두면 죽는다.'
그 생각이 스치자, 서연은 자신이 지켜야 할 서약보다도 먼저 몸이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손끝의 감각이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짐승처럼 눈을 뜨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아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발소리.
서연이 오두막을 향해 뛰는 동안, 등 뒤에서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점점 멀어져 갔고, 그녀는 낡은 문을 발로 밀어 열며 아이를 침상 위에 눕힌 뒤, 곧바로 물을 데우고 마을에서 얻어온 소량의 곡식으로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끓는 소리.
보글보글, 냄비 속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동안,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손끝을 냄비 가장자리에 살짝 얹었는데, 그 순간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익숙한 온기가 죽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결이 부드럽게 얽혀들며 죽의 맛과 소화가 쉬운 성질을 만들어내는 것을, 그녀는 오랜만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만이 다룰 수 있는 결이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의 흐름을 읽고 다스리는 이 힘은, 한때는 왕실의 축복이라 불리며 그녀를 빛나게 했지만, 지금은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될 서약 속에 갇힌 능력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늘 조심스럽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끝만을 움직여 왔었다.
"…………뭐예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는데, 눈을 살짝 뜬 아이가 서연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물었고, 서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면서도,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곧 나을 거야. 이름이 뭐니?"
"…………하나."
아이는 그렇게 짧게 답한 뒤, 서연이 숟가락으로 떠 건넨 죽을 몇 숟갈 받아먹었는데, 그 순간 하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커지는 것을, 서연은 놓치지 않았고, '설마…….'라는 불안이 스치는 순간에도 아이는 그저 조용히 죽을 넘기고 있을 뿐이었다.
죽 한 그릇을 거의 다 비운 하나의 뺨에 조금씩 붉은 기운이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며, 서연은 손끝으로 아이의 이마를 조심스레 짚어보았는데, 다행히 열은 아직 심하지 않았고, 그것이 그녀의 어깨에서 조금이나마 긴장을 내려놓게 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니?"
조심스레 물은 서연의 질문에, 하나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고 왔어요."
그 말에 담긴 무게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서연은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아이의 눈동자 깊은 곳에 서린 그늘이 더 캐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여, 그녀는 그저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었는데, 그러자 하나는 처음으로 옅게 웃어 보였고, 그 미소가 서연의 가슴 한구석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한편 이 무렵, 서연이 이미 알지 못하는 왕도에서는 또 다른 소식이 오가고 있었는데, 이건우 왕자가 여진과의 혼인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며, 서연과의 파혼을 완전히 못박아버렸다는 소식이었다.
화려한 연회장의 샹들리에 아래, 귀족들이 저마다 잔을 부딪치며 웃음을 흘리는 사이, 이건우는 단상 위에 올라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제 그 여자는 더 이상 왕실과 아무 관계도 없다."
왕자가 그렇게 선언하던 자리에서, 여진은 분홍빛 곱슬머리를 흩날리며 환하게 웃었고, 그 웃음이 마치 승리를 확인하는 듯이 연회장 곳곳으로 퍼져 나갔는데, 그 웃음을 지켜보던 귀족들은 저마다 서연을 향한 조롱의 말들을 은밀히 주고받았다.
"독살까지 시도한 여자였다니, 소름 끼치는 일이지."
"그런 여자를 왕자님께서 진작 알아보셨어야 했는데 말이야."
"쫓겨난 게 당연하지, 안 그래?"
그 말들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렇게 서연의 이름은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지만, 정작 서연 자신은 그 순간 청림촌의 작은 오두막에서, 낯선 아이의 이마를 짚어주며 열이 조금씩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아 있었고, 오두막 안에는 낡은 등불 하나가 흔들리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에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고마워요……."
하나가 잠들기 직전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서연은 그 말에 담긴 진심을 느끼며 처음으로 오랜만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동시에 이 아이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왜 저 손목에 그런 상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문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오두막 바깥에서 낮게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박, 사박.
누군가의 발걸음이 오두막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서연은 잠든 하나를 품에 안은 채로 굳어버린 듯 몸을 움직이지 못했는데, '이 시각에……, 대체 누가.'라는 불안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가는 그 순간에도, 발소리는 멈추지 않고 문 앞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