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청림촌에 도착하기 전, 서연은 왕궁의 마지막 관리로부터 한 장의 서약서를 건네받았는데, 그 문서에는 그녀가 지녔던 발효 마법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고, 그 아래 서명란에는 이미 왕실의 인장이 찍혀 있어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무언으로 알리고 있었다.
양피지는 오래 다뤄온 손길인지 모서리가 닳아 있었고, 그 위에 적힌 글자들은 하나같이 차갑고 건조한 문체로 서연의 죄를 나열하고 있었는데, '왕명을 어기고 금지된 힘을 사용하여 왕실의 위엄을 훼손한 죄'라는 문구를 눈으로 좇으며 서연은 자신이 정말로 그토록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했다.
"이 조건을 어기면, 유배가 아니라 처형이 될 것입니다."
관리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경고했고, 서연은 그 말이 던지는 서늘한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는데,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그녀는 애써 숨을 길게 내쉬었다.
관리의 눈빛에는 동정도, 조롱도 담겨 있지 않았고 그저 서류를 처리하는 사람의 무심함만이 있었는데, 그 무심함이 오히려 서연의 가슴을 더 깊이 후벼 팠으니, 적어도 경멸이라면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하는 감정이었을 것이지만 이것은 그녀를 이미 사람이 아닌 처분해야 할 물건처럼 다루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절대로 이 힘을 다시 꺼내서는 안 돼.'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서연은 자신이 그 다짐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힘은 감정과 맞닿아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억누른다는 것은 곧 자신의 마음까지 통째로 얼려버리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차에 올라 왕도를 벗어나는 동안, 서연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풍경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는데, 그것이 다시는 보지 못할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자 목 안쪽이 뻐근하게 조여왔고, 그녀는 애써 그 감각을 삼키며 무릎 위에 놓인 서약서를 두 손으로 꼭 그러쥐었다.
덜컹, 덜컹.
마차 바퀴가 돌부리를 넘을 때마다 몸이 크게 흔들렸고, 그 흔들림 속에서 서연은 자신의 지난 삶이 이렇게 통째로 뒤흔들려 어딘가로 굴러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청림촌은 왕도로부터 하루 거리에 위치한 변경의 작은 마을로, 지도상에서는 존재감조차 미미한 곳이었지만, 서연이 도착했을 때 그곳은 예상보다 더 황폐한 풍경으로 그녀를 맞이했으며, 낡은 목조 가옥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사이로 흙먼지가 바람에 실려 날아다니고 있었다.
긴 여정 끝에 마주한 마을의 첫 인상은 서연이 상상했던 그 어떤 최악의 그림보다도 더 초라했는데, 지붕이 반쯤 무너진 창고와 잡초가 무성한 밭두렁, 그리고 어디선가 풍겨오는 가축의 배설물 냄새가 뒤섞여 그녀의 코끝을 자극했고, 그 모든 풍경이 그녀에게 이곳이 바로 자신의 남은 삶이 놓일 자리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각인시켰다.
마을 이장이라는 노인이 서연을 맞으러 나왔는데, 그는 그녀를 향해 위아래로 훑어보는 듯한 시선을 던지며 낮게 혀를 찼다.
"귀족 아가씨가 여기서 뭘 할 수 있으려나……."
그 말에는 명백한 경멸이 섞여 있었지만, 서연은 그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자신에게 배정된 작은 오두막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이장의 시선이 등 뒤로 따라붙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걸음을 서두르지도, 늦추지도 않은 채 그저 담담한 걸음으로 흙길을 밟아나갔다.
이장 옆에 서 있던 몇몇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팔짱을 낀 채 서연을 구경거리처럼 바라보았고, 그중 한 아낙이 옆 사람에게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서연의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저 여자가 그 마법 쓰다 쫓겨난 여자래……."
'그런데 왜, 나는 여기서까지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걸까.'
서연은 그렇게 속으로 되물었지만, 답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그 물음을 붙들고 있지 않았고, 오두막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을 열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곰팡내와 낡은 나무 냄새가 훅 끼쳐왔고, 방 안 곳곳에는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흔적이 그대로 쌓여 있었는데, 거미줄이 천장 구석마다 늘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아 발을 디딜 때마다 뽀얀 자국이 남았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연은 홀로 방 안에 남겨졌고, 그 순간 처음으로 참아왔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는데, 그러나 그녀는 곧 손등으로 눈가를 세게 눌러 닦아내며, '여기서 무너지면 끝이야'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잡았다.
한때 홀로 방 안에서 몰래 술과 장을 빚어내며 스스로를 달래었던 그녀의 손끝은, 그 손끝이 만들어낸 향기만이 좁은 방 안을 은은하게 채우곤 했었는데, 지금 이 낡은 오두막 안에서 그 기억은 오히려 더 잔인하게 그녀의 처지를 대비시킬 뿐이었으니, 서연은 그 낙차 앞에서 잠시 숨을 쉬는 법조차 잊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서연에게 남은 것은 왕실이 던져준 최소한의 생활비와, 감춰야만 하는 힘, 그리고 아무도 그녀를 알지 못하는 낯선 마을뿐이었는데, 그녀는 그날 밤 오두막 바닥에 앉아 자신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 되짚어보며, 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생활비라 해봐야 몇 달을 버티기에도 빠듯한 액수였고, 그마저도 마을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들이면 금세 바닥을 보일 것이 분명했는데, 서연은 손끝으로 동전을 세어보며 그 무게가 자신의 남은 시간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받아들였다.
'감춰야 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써야 해.'
그 생각이 문득 떠오른 것은, 오두막 한쪽에 방치되어 있던 낡은 항아리들을 발견했을 때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버리듯 쌓아둔 그 항아리에는 오래전 담가둔 장이 반쯤 상해 있었지만, 서연의 눈에는 그 안에서 미묘하게 살아 움직이는 미생물의 결이 여전히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촛불 하나를 밝혀 항아리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보았는데, 훅 끼쳐오는 시큼하고 텁텁한 냄새 속에서도 그녀의 눈은 오랜만에 반짝였고, 손끝으로 그 표면을 살짝 스치자 마치 오랜 벗을 만난 것처럼 익숙한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왕실의 서약은 '마법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지만, 서연은 그 문구를 곱씹으며 한 가지 틈을 발견해냈는데, 만약 그녀가 그저 정성을 담아 발효를 돕는다면, 그것이 마법인지 아니면 손끝의 기술인지 누구도 확실히 구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그 생각에 이르자 서연의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저려왔는데, 그것은 희망이라 부르기엔 너무 조심스러웠고, 두려움이라 부르기엔 이미 그녀 안에서 무언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그 밤 서연은 항아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랜만에 자신의 손끝으로 미생물의 결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는데, 손바닥에서 퍼져나가는 은은한 온기가 항아리 속 장의 색을 서서히 짙고 고르게 바꾸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는 오랜만에 자신의 존재가 무언가에 쓰이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항아리 속 표면도 함께 일렁였고, 서연은 그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자신의 힘을 최소한으로, 최대한 은밀하게 풀어냈는데, 그것은 왕궁에서 화려하게 펼쳤던 마법과는 전혀 다른, 숨죽인 손길이었다.
'이 정도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서연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항아리들을 하나씩 돌아보았고, 오랜만에 느끼는 그 몰입의 감각 속에서 자신이 유배당한 죄인이 아니라 여전히 무언가를 빚어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밤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다음 날 아침 마을 어귀에서 아이 하나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서연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유 없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왜……, 하필 지금.'
맨발로 흙바닥을 딛고 뛰어나가는 그녀의 머릿속으로, 어젯밤 자신이 항아리에 손을 얹었던 순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설마 그 힘의 흔적이 무언가 잘못된 방향으로 새어나간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으며, 마을 어귀를 향해 달려가는 그녀의 심장은 이미 두려움으로 터질 듯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