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누명 영애, 발효로 웃다

1화

왕궁의 대전에서 파혼을 선언받던 그 순간, 한서연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두 손을 모아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을, 그녀는 마차에 실려 청림촌으로 향하는 지금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대전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무릎 아래로 닿는 감촉까지도, 그녀는 여전히 생생하게 되새길 수 있었는데, 그 자리에 모인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쏟아지던 그 순간의 무게란, 마치 온몸이 얼음물 속에 잠기는 듯한 감각이었다는 것을, 서연은 지금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함으로 되새기고 있었다. 덜컹. 마차가 돌부리에 걸려 크게 흔들릴 때마다 서연의 몸도 함께 흔들렸지만, 그녀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낯선 풍경을 무심히 바라볼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호송을 맡은 병사들조차 그런 그녀의 침묵을 불편하게 여기는 듯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병사들의 눈빛 속에는 호기심과 경멸이 뒤섞여 있었는데, 살인미수범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쓴 귀족 여인이 어찌 저리도 태연할 수 있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지 못했고, 그중 한 명은 서연을 향해 힐끗거리다가도 시선이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돌리곤 했다. '독살 미수죄라니…….' 속으로 되뇌던 그 말은, 사실 서연 자신조차도 실감이 나지 않는 죄명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이건우 왕자의 찻잔에 손끝조차 대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다만 왕자가 대전 앞에서 그렇게 선언했을 때, 이미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녀를 살인미수범으로 확정지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을까.' 증거가 무엇인지, 정황이 무엇인지, 단 한 사람도 그녀에게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서연의 가슴 한복판에 뻐근한 통증으로 내려앉았지만, 그녀는 그 통증마저도 표정 위로 드러내지 않으려 안면의 근육 하나까지 다스리고 있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그렇게 애원하는 대신, 서연은 그저 눈을 감았고, 그 침묵이야말로 자신을 지킬 유일한 방패라는 것을,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배워왔던 사람이었다. 서연의 유년은 언제나 조용한 소외의 시간이었는데, 지방 귀족 가문의 장녀로 태어났으나 그녀가 지닌 힘은 가문의 자랑이 아니라 숨겨야 할 흠이었고, 어린 서연이 발효 마법이라 불리는 능력을 처음 발현했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손끝을 저리게 만드는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일곱 살의 서연이 우연히 항아리 속 장을 만지다 손끝에서 뿌옇게 퍼지던 곰팡이의 결을 보았을 때, 곁에 있던 유모는 소리를 지르며 뒷걸음질 쳤고, 그 비명 소리가 온 저택을 흔들었으며, 뒤이어 달려온 아버지는 딸의 손을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다시는……, 다시는 이 힘을 남에게 보이지 마라." 그 말에 담긴 것은 걱정이 아니라 수치심이었다는 것을, 어린 서연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아버지의 손이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던 그 힘이 얼마나 세었는지, 며칠이 지나도 붉은 자국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을, 그녀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자신의 손끝에서 피어나던 미생물의 결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기 위해, 식사 자리에서조차 유독 조심스레 젓가락을 움직이는 아이가 되어 있었고, 심지어 목욕물에 손을 담글 때조차 물의 표면이 조금이라도 흐려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숨을 죽이는 버릇이 생겼다. 발효 마법이라 불리는 것은, 미생물의 생장을 다스려 음식의 맛과 성질을 바꾸는 능력으로, 천명국에서는 오래전부터 하급 마법으로 취급되어 왔으며, 화려한 불꽃이나 얼음을 다루는 마법사들 옆에서는 그저 부엌일이나 하는 잡기로 여겨졌기 때문에, 귀족 가문에서 이 힘을 지닌 딸이 태어나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감춰야 할 결함으로 통했다. 궁정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발효 마법사를 두고 '항아리 마법사'라 부르며 낮잡아 부르는 풍조가 있었는데, 그 호칭 속에는 부엌간이나 지키는 하찮은 존재라는 조롱이 짙게 배어 있었고, 서연은 그런 소문을 어릴 적부터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자신이 지닌 힘을 스스로도 부끄러워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게다가 이 힘은 사용자의 감정 상태에 따라 그 성질이 달라진다는 특이점을 지니고 있어서, 마음이 평온할 때는 이로운 발효를 만들어내지만 분노나 절망에 휩싸이면 독성을 지닌 균으로 변질된다는 것이, 서연의 아버지가 딸의 힘을 더욱 두려워한 진짜 이유였는데, 자칫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딸이 저택 안에서 사고를 일으킬까 봐, 그는 서연을 방 안에 가두고 사교 모임에도 잘 내보내지 않았다. 그 방에는 창문이 하나뿐이었고, 서연은 그 창을 통해 계절이 바뀌는 것을 지켜보는 것으로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는데, 봄이 오면 정원의 나무들이 꽃을 피우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나도 저 나무들처럼 마음껏 피어날 수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품었다가도, 이내 그 생각을 스스로 지워버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자란 서연에게 유일한 위안은 여동생 한지아였는데, 지아는 언니와 달리 화려하고 사교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사교계에서는 이미 '백합'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인기가 많았지만, 그런 지아조차도 언니의 힘에 대해서는 한 번도 캐묻지 않았고, 다만 밤마다 서연의 방에 몰래 찾아와 손을 꼭 잡아주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했다. 지아가 몰래 가져온 사탕과자를 손바닥에 올려주며 눈을 반짝이던 그 밤들이, 서연에게는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언니의 방문 앞에 서서 조그맣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서연의 가슴은 이상하게도 두근거리며 부풀어 올랐다는 것을, 그녀는 지금도 손끝의 온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언니는 언젠가 이 힘으로 대단한 일을 할 거야." 지아가 그렇게 속삭일 때마다 서연은 웃음으로 답했지만, 속으로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그런 날이 올 리 없어……'라는 생각이 언제나 먼저 떠올랐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이 힘은 그저 감추고 억눌러야 할 짐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지아의 목소리가 남긴 온기만큼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서연의 가슴 한구석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오늘 대전에서 이건우 왕자가 파혼을 선언하던 그 순간에도, 서연은 문득 동생의 얼굴이 떠올라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 자리에는 지아가 없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아가 이 모습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런 생각이 스치자,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옅은 숨을 내쉬었고, 마차의 흔들림 속에서 그 숨소리마저 삼켜지고 말았다. 마차가 다시 크게 흔들리며 서연의 상념을 흩어놓았고, 그녀는 창밖으로 스쳐 가는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며, 이제 자신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그제야 실감하기 시작했다. 들판 위로 낮게 깔린 안개가 마차의 바퀴 자국을 따라 흩어지는 모습을, 서연은 오래도록 응시했는데, 그 풍경이 낯설고도 서글프게 느껴진 것은, 그녀가 태어나 지금껏 단 한 번도 저택의 담장 밖으로 이렇게 멀리 나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림촌까지는 아직 하루가 더 걸립니다." 호송을 맡은 병사 하나가 무뚝뚝하게 던진 그 말에, 서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고, 다만 손끝에 남아 있던 예전의 저림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꼭 움켜쥐고 말았다. '청림촌…….' 낯선 지명이 입안에서 굴러다니듯 되뇌어질 때마다, 서연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아득해지고 말았는데,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마을은, 죄인들이나 쫓겨난 자들이 흘러들어 정착한다는 이야기가 전부였고, 그런 곳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서연은 아직 그 어떤 그림도 그릴 수 없었다. '이제 아무도 나를 감추라 하지 않겠지.'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서연의 가슴 한구석에서 낯설고도 서늘한 감정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지만, 그것이 두려움인지 혹은 다른 무언가인지 그녀 자신도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마차의 창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서연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 서늘한 감촉에 그녀는 문득 손끝을 내려다보았는데,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그 힘이, 이제는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마차가 갑작스레 속도를 줄이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앞자리에 앉아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는 것을, 서연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여전히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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