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안경 쓴 영애의 여름밤

5화

재봉사 김선희의 작업실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골목에 있었는데, 낡은 나무 대문을 밀고 들어가자마자 옷감 특유의 풀 먹인 냄새와 실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코끝을 스쳤다. 좁은 골목 안쪽으로 들어설 때마다 윤소은은 늘 조금 긴장했는데, 이런 작업실 특유의 정적과, 벽에 걸린 완성되지 않은 옷들이 어쩐지 사람처럼 보여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윤소은이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 김선희는 이미 몇 가지 견본 옷감을 펼쳐 두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도윤 도련님께서 색까지 미리 정해 두셨더라고요. 이 옥색이 아가씨한테 잘 어울릴 거라고 하시면서." 그 말을 들으며 윤소은은 묘한 기분에 잠겼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색을 그가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 손끝으로 옷감의 결을 괜히 쓸어 보았다. '나조차 딱히 말한 적 없는데.' 옥색이라니. 그것도 흔하지 않은, 옅고 서늘한 빛깔의 옥색이라니. '책 표지 색깔이었나.' 지난번 그가 빌려 갔던 항해 소설의 표지가 옅은 옥색이었다는 걸 떠올리고서야, 윤소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설마 그것 때문에 이 색을 골랐을 리는 없는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그 가능성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서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김선희는 그런 윤소은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듯, 옷감을 이리저리 대어 보며 색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세요, 아가씨. 살빛이 워낙 밝으셔서 그런지 옥색이 정말 잘 어울리네요. 도련님 안목이 대단하시다니까요." 그 말에 윤소은은 그저 옅게 웃어 보일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첫 번째 가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김선희는 능숙한 손길로 어깨선과 허리선을 잡아 가며 몇 번이나 핀을 꽂았다 뺐다 반복했다. 가는 핀이 살갗 가까이를 지날 때마다 윤소은은 숨을 죽였는데, 그 조심스러운 손놀림 속에서도 옷이 조금씩 자신의 몸에 맞춰져 가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참으세요. 이제 거의 다 됐어요." 김선희의 목소리에는 오랜 경력에서 오는 여유가 배어 있었고, 윤소은은 그 손끝을 따라 천천히 팔을 들었다가 내렸다가 하며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두 번째 방문 날, 마지막 손질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작업실을 찾았을 때, 뜻밖에도 한도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의 뒷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그 큰 체구가 좁은 작업실 안에서 유난히 낯설게 느껴져서 윤소은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도련님께서 옷감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김선희의 설명에 윤소은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을 물릴 수는 없었다. '옷감 상태를 왜 저이가 직접 확인한다는 건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굳이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윤소은은 그냥 고개를 숙여 인사만 하고는 자리에 섰다. 한도윤은 완성되어 가는 드레스를 보며, 옷자락의 레이스 장식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태도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진지해서 오히려 윤소은이 어색해졌다. 그가 드레스의 밑단을 살피느라 허리를 살짝 굽히자, 그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윤소은은 저도 모르게 팔을 몸 쪽으로 당겼다. '그냥 옷을 보는 거잖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어쩐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소은 양이 원하는 방향과 맞소?" "네... 정말 예뻐요. 감사해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는데, 그것이 옷 때문인지, 그의 시선 때문인지 스스로도 헷갈렸다. 한도윤은 그 대답에 별다른 말 없이 다시 옷자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 무심한 듯한 태도가 윤소은에게는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저이는 정말 옷감만 보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문득 자신이 무슨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의아해져서 고개를 살짝 저었다. 가봉을 마치기 위해 소매 끝단을 마지막으로 손보던 중, 김선희가 잠시 다른 실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고, 작업실 안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는데, 그 소리가 사그라들고 나자 작업실 안은 정말로 조용해져서 옷감이 스치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윤소은은 팔을 들어 소매 길이를 살피며 애써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마차 소리,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런 것들에라도 집중하려 했지만, 시야 한쪽에 서 있는 그의 존재감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서 윤소은은 그저 소매 끝만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한도윤이 소매 끝에 삐죽 나온 실오라기를 무심코 걷어내려 손을 뻗은 순간, 그의 손끝이 그녀의 손목 위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적인 접촉이었는데도, 윤소은은 그 온기가 마치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져서 숨이 멎는 듯했다. 손목 위로 지나간 그 온기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는데, 그저 낯선 감각이라는 사실만으로 몸 전체가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한도윤 역시 순간 손을 멈추었는데, 그 짧은 정지가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듯 시선을 살짝 피했다. '실오라기 하나 걷어 내는 게 뭐가 어렵다고.' 속으로 그렇게 자책하면서도, 손끝에 남은 감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아 한도윤은 애써 표정을 다잡았다. "실이 걸려 있었소." 짧게 둘러대는 말에, 윤소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손목에 남은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실 때문이라고 했잖아.'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그녀는 왜인지 그 순간을 몇 번이나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김선희가 실타래를 들고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었는데, 그 어색한 정적을 눈치채지 못한 김선희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소매 끝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끝났어요.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아가씨." 그 말에 윤소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목의 감각에 신경이 쏠려서 김선희가 손을 움직이는 것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도윤은 이내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가, 야회 날 정원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을 다시 확인했는데, 그 목소리에는 방금 전의 흔들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서 오히려 윤소은은 이상하게도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저이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었나 보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괜히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는데, 그 감정의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 없어서 윤소은은 그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작업실을 나서며 마차에 오르는 길, 창밖으로 저녁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바라보던 윤소은은, 문득 강윤재가 서지아에게 귀걸이를 건네던 그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그때는 서지아의 손끝이 강윤재의 손가락에 스쳤어도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는데, 오늘 손목에 남은 이 미묘한 감각은 왜 이렇게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것인지, 그녀는 답을 찾지 못한 채 창에 이마를 가만히 기대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창틀에 이마가 살짝 부딪혔는데, 그 작은 통증조차 손목의 그 감각을 잊게 해 주지는 못했다. '그냥 우연히 스친 것뿐인데.' 그렇게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그 순간이 우연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것 같아서, 윤소은은 스스로도 낯설어졌다. 집에 도착한 뒤에도 손목의 그 자리가 자꾸 신경 쓰여, 소매를 걷어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붉게 물든 자국 하나 없이 그저 평소와 같은 살빛이었는데, 그 사실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져서 윤소은은 손목을 몇 번이나 문질러 보았다. 그저 스쳐 지나간 손끝일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마음 한편이 술렁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방 안의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비친 그림자도 함께 흔들렸는데, 윤소은은 그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오늘 하루 종일 그 손끝의 감각만 떠올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무엇이 안 되는지 스스로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저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윤소은은 이불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창밖으로 별이 하나둘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윤소은은 다가오는 야회 날이 기대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지는, 낯선 감정 속으로 조금씩 빠져들고 있었다. 야회 날 정원에서 그를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윤소은은 쉽게 잠들지 못한 채 몇 번이나 이불깃을 고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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