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며칠 뒤, 학원 복도는 오후의 햇살이 창을 통해 비스듬히 스며들며 먼지 하나까지 도드라져 보이는 시간이었는데, 한아름이 그 햇살 사이를 가로질러 다가와서는 윤소은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오늘 강릉 공작가에서 다과회가 있대."
한아름의 손끝은 가벼웠지만, 윤소은의 소매를 붙든 힘은 은근히 단단해서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고, 그녀는 반쯤 장난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강윤재 님도 오신다던데."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윤소은의 손끝이 살짝 굳었다. 손가락 마디 하나가 미세하게 접혔다가 펴지는 정도의 움직임이었을 뿐인데, 그마저도 스스로 의식하고는 서둘러 손을 펴서 겉으로는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목덜미 어딘가가 미묘하게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한아름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짓궂은 미소를 지었는데, 완전히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런 소문을 전하고 상대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오래된 놀이 같은 것이었다.
"서지아 님도 오신다는데, 알지? 왕태자 전하의 혼약자라는 그분."
윤소은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강윤재가 유년 시절부터 서지아를 짝사랑해 왔다는 사실을. 그것은 이 저택 안에서, 아니 어쩌면 사교계 전체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왕태자가 십 년 넘게 외국에서 유학 중이라는 이유로, 그 자리를 대신하듯 서지아를 에스코트하는 것이 강윤재의 오랜 습관이었고, 그 습관은 누구도 이상하다 여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반복되어 왔다.
"괜찮아? 표정이 좀..."
한아름이 말을 잇다가, 윤소은이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걷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깨를 슬쩍 밀며 웃었다.
"아니다, 됐어. 가자."
다과회 장소에 도착했을 때, 정원의 장미 향이 옷깃까지 스며들 정도로 짙었다. 흰 테이블보 위로 은쟁반이 놓이고, 그 위에 얹힌 다과의 단 냄새가 장미향과 섞여 이상하게 어지러운 기분을 만들어냈는데, 윤소은은 그 향기 속에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발밑의 자갈길이 유난히 딱딱하게 느껴졌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맛자락이 스치는 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테이블 저편에서 강윤재가 서지아와 나란히 앉아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웃음이 그녀를 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고, 그 새삼스러움에 스스로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제 와서 뭘.' 몇 번이나 봐온 광경이었는데, 오늘은 왜 유난히 눈에 밟히는지 알 수 없었다.
윤소은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그 광경을 그저 지켜보는 쪽을 선택했다. 찻잔의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시선은 애써 창밖의 정원수 쪽으로 두었지만, 귀는 자연히 테이블 저편의 웃음소리를 향해 있었다.
그런데 강윤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상자를 꺼내 들고 서지아 앞으로 다가가는 순간, 주변의 대화 소리가 잠시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사방에서 시선이 조금씩 그쪽으로 몰리는 것이 느껴졌고, 부채로 입을 가린 귀부인 몇몇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것도 보였다.
"당신에게 어울릴 것 같아 준비했소."
강윤재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상자를 열자, 은세공으로 만들어진 귀걸이가 반짝였다. 가느다란 은실이 꽃 모양으로 얽혀 있는 세공이었는데, 그 섬세한 세공이 그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것을 고르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을지, 윤소은은 문득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서지아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듯도 했는데, 그것이 기쁨 때문인지 당혹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변 귀부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장면에 쏟아졌고, 몇몇은 손을 모으며 작게 탄성을 흘렸다.
윤소은은 그 모든 시선의 한가운데서, 자신이 마치 배경으로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세트장 한쪽에 세워둔 소품처럼, 누구의 시선도 자신에게 머물지 않은 채 지나쳐 가는 것 같았다. 혼약자가 다른 여인에게 선물을 건네는 장면을, 정혼자인 자신이 눈앞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이 상황이, 새삼 우스웠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나지 않을까.'
예상과 달리 가슴 어딘가가 뜨겁게 데워지는 대신, 오히려 서늘하게 가라앉는 감각만 남았다. 손끝의 찻잔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고, 그 차가움이 오히려 위안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이런 순간을 수없이 겪어 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마음 한구석에서 그를 놓아 버린 것일까,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이런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그때마다 조금씩 무뎌졌던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별다른 감정이 없었던 것인지조차 이제는 헷갈렸다.
한아름이 곁눈질로 윤소은의 표정을 살피며, 위로의 말을 건네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그녀가 너무나 담담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말을 삼켰다. 손끝으로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며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결국 조심스레 물었다.
"소은아, 너... 괜찮아?"
"응, 괜찮아."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목소리에 흔들림이 전혀 없어서, 한아름은 그녀를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되었다. 표정도, 손짓도, 찻잔을 쥔 자세까지도 조금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 담담함이 한아름에게는 더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사람이 저렇게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과회 한편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도윤 역시, 윤소은의 태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 이런 자리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어서, 구석의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차를 마시는 척하며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는데, 오늘은 유난히 한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상처받은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정원의 새소리에 귀 기울이는 듯한 그녀의 옆모습을 보며, 그는 처음 도서관에서 느꼈던 인상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저 조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상처를 삼키는 방식이 이렇게 고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한도윤에게는 오히려 낯설고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저런 순간에 눈가가 붉어지거나 손끝이 떨리기라도 할 텐데, 그녀에게서는 그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그의 시선을 더 오래 붙잡아 두었다.
다과회가 끝나갈 무렵,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정리하며 흩어지는 사이, 그는 다시 윤소은의 곁으로 다가와 나지막이 물었다.
"괜찮으시오?"
윤소은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별다른 동정이나 호기심이 섞여 있지 않았는데, 그저 순수한 물음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대답하기가 쉬웠다.
"저는 늘 이랬어요."
그 대답에 담긴 어떤 체념 같은 것을, 한도윤은 그날 이후로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몇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윤소은은 창밖의 노을을 바라보았다. 붉은 빛이 산등성이를 따라 번지는 모습이 유독 선명했는데, 오늘 목격한 장면이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기지 않은 것에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마차 바퀴가 자갈길을 지날 때마다 몸이 흔들렸지만, 그 흔들림조차 어딘가 먼 곳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놀라움 뒤에는, 이상하게도 한도윤의 시선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가 던진 짧은 물음 하나가, 오늘 있었던 그 어떤 장면보다도 선명하게 마음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윤소은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창밖의 노을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순간을 몇 번이나 되짚어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