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안경 쓴 영애의 여름밤

4화

다과회 이후 며칠이 지나도록, 저택의 분위기는 어딘가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귀걸이 사건에 대한 소문이 벌써 사교계에 퍼진 모양인지, 어머니는 저녁 식탁에서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며 딸의 얼굴을 살폈다. 국그릇에서 올라오는 김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채우는 것 같았고,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어머니의 눈빛은 조금씩 무거워지는 듯했다. "소은아, 정말 아무렇지 않니?" "괜찮아요, 어머니." 윤소은은 국물을 뜨며 짧게 대답했지만, 어머니는 그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딸의 손등을 슬쩍 쳐다보는 그 시선에는, 자식이 겪었을 수모를 대신 아파하는 어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윤소은은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애써 고개를 들지 않았다. '괜찮다고 백 번 말해도 소용없겠지.' 어머니의 걱정은 딸의 대답보다 늘 한 걸음 더 앞서 있었으니까. 식탁 위로 오가는 대화는 뜸해졌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작은 소리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저녁, 한도윤이 보낸 초대장이 저택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집안 분위기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하녀가 들고 온 봉투는 두툼한 종이에 인장까지 찍혀 있어, 그 무게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은 손님의 존재를 짐작하게 했다. 이문 자작가의 여름 야회 초대장이라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서류를 뒤적이던 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안경 너머로 초대장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 눈빛에는, 오랜 세월 살림을 꾸려온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신중한 계산이 스쳐 지나갔다. "이문 자작가라... 그 댁이라면 나쁘지 않은 집안이지만, 야회에 참석하려면 옷도 새로 지어야 할 텐데." 아버지의 말끝에는 늘 그렇듯 살림 걱정이 묻어 있었고, 윤소은은 그 익숙한 걱정에 잠시 시선을 내렸다. '역시 그렇겠지.' 이 집에서 무언가를 하려면 언제나 돈이 먼저 걸림돌이 되었으니, 그 사실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평소와 달리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이번엔 보내는 게 좋겠어요. 소은이도 이제 사교계에 얼굴을 좀 비쳐야 할 나이인데, 계속 도서관에만 있으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쉬워요." 딸의 지나친 은둔이 오히려 소문거리가 될 수 있다는 어머니의 지적에, 아버지도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예산이 어디서 나올지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모습이, 윤소은의 눈에는 조금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윤소은은 자신의 참석 여부가 이렇게 부모의 대화 속에서 결정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순응하며 방으로 돌아갔을 텐데, 이번에는 어쩐지 스스로 입을 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목 안에서 말이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다. "저... 가고 싶어요." 조용하지만 분명한 그 한마디에, 식탁에 앉은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어머니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고, 아버지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딸의 그 짧은 한마디가 그동안의 침묵보다 더 큰 무게로 식탁 위에 내려앉는 것 같았다. 동생 민준만이 무심한 얼굴로 국을 뜨며, 누나가 야회에 간다는 사실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 무심함이 오히려 익숙해서 윤소은은 씁쓸하게 웃었다. '저 녀석은 내가 뭘 하든 관심이 없지.' 하지만 그 무심함이 새삼스레 서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익숙함이 지금 이 순간의 낯선 설렘을 다잡아주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먼저 원해서 뭔가를 정한 게, 얼마나 오랜만이었지.' 식사가 끝난 뒤 방으로 돌아온 윤소은은, 책상 위에 놓인 초대장을 다시 한 번 펼쳐 보았다. 종이는 두껍고 결이 고왔으며, 손끝으로 문지르면 은은한 나무 향 같은 것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한도윤의 필체는 단정하면서도 어딘지 힘이 있는 모양이었고, 초대장 끝자락에는 짧은 문장이 덧붙어 있었다. '좋아하는 책을 한 권 챙겨 오시오.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할 테니.' 그 문장을 읽으며, 윤소은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단정한 글씨 속에 어울리지 않게 무뚝뚝한 청유가 담겨 있어서, 그 사람의 얼굴과 말투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하다니. 그건 나를 위한 말일까, 자신을 위한 말일까.' 알 수 없는 물음이 밤늦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음 날, 아버지는 도서관에 다녀올 시간을 조금 줄이라는 조건을 내걸며 옷값에 대한 예산을 정해 주었는데, 넉넉하지 않은 액수였지만 윤소은에게는 그마저도 충분히 기쁜 일이었다. 옷장 안에 걸린 낡은 옷들을 떠올리면, 새 드레스 한 벌이 생긴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들뜨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읍내 재봉사에게 연락을 넣겠다고 했는데, 며칠 뒤 뜻밖에도 그 재봉사에게 이미 한도윤 쪽에서 먼저 의뢰를 넣어 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문 자작가 도련님께서, 소은 양의 드레스는 자신이 부담하시겠다고 하셨답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하녀의 말에, 어머니는 놀란 얼굴로 딸을 바라보았고, 윤소은 역시 뜻밖의 배려에 얼굴이 붉어지는 걸 감출 수 없었다. 목덜미까지 뻗어가는 열기를 느끼며, 그녀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그런 것까지 부담하실 필요는 없는데..." 윤소은이 더듬거리며 말했지만, 하녀는 이미 정해진 일이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어머니는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무언가를 짐작하는 눈치였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고 그저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줄 이유가 있을까.' 호의인지, 그저 예의인지 알 수 없는 그 마음이, 자꾸만 그녀의 가슴 한편을 간지럽혔다. 그저 자작가의 체면을 위한 것일 수도 있는데, 왜 자꾸만 다른 의미를 찾으려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많다.' 생각이 너무 많다는 자각이 들자, 윤소은은 애써 고개를 흔들며 그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며칠 뒤, 읍내 재봉사가 저택을 방문해 치수를 재는 동안, 윤소은은 낯선 손길에 몸을 맡기며 어색함을 감추려 애썼다. 옷감을 두른 채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는데, 평소의 수더분한 옷차림과는 전혀 다른, 화려한 색감의 천이 몸에 감기는 그 느낌이 묘하게 설레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색은 어떤 걸로 하실까요?" 재봉사의 물음에 윤소은은 잠시 고민했지만, 딱히 마음에 정한 색이 없어 대답을 망설였다. 그저 초대장에 적힌 짧은 문장을 떠올리며, 어떤 색이 자신에게 어울릴지 상상해 볼 뿐이었다. 그날 밤, 창가에 앉아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윤소은은 처음으로 야회 날이 기대된다는 생각을 했다. 별빛이 유난히 또렷하게 반짝이는 것 같았고, 그 빛을 눈에 담으며 며칠 뒤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대감 속에는, 강윤재를 향한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설렘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그 설렘이 낯설면서도 싫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창밖의 밤바람이 방 안으로 스며들며 커튼을 살랑이는 동안, 윤소은은 이 알 수 없는 마음의 정체를 아직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그저 그 감정을 조심스레 품어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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