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안경 쓴 영애의 여름밤

2화

다음 날에도 윤소은은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창가 자리는 오후가 되면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책장 위로 옅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이었는데, 그녀는 언제나 그 그림자가 짙어지는 순간까지 자리를 지키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시선이 자꾸 서가 쪽으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제 본 그 낯선 남자가 다시 나타날까 궁금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습관처럼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이 몇 번이나 같은 문단을 헛되이 오갔고, 글자는 눈에 들어오는 듯하다가도 금세 흩어져 버렸다. '별일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정말로 문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절제된, 서두르지 않는 걸음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곧장 그녀가 앉은 창가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윤소은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고, 어제 그 남자가 자연스럽게 맞은편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동자 색이 낮의 빛 아래서는 어제보다 조금 더 짙은 갈색으로 보였고, 옷깃 사이로 스치는 향은 나무를 태운 듯한 옅은 냄새였는데, 그것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자주 오시는군요." 그가 먼저 말을 걸었는데,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나 억양이 어딘지 다른 나라 말투처럼 미묘하게 낯설었다. 그 낯섦이 오히려 그를 실제보다 더 먼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윤소은은 대답할 말을 고르다가, 결국 짧게 고개만 끄덕였고, 그 어색한 침묵을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책장을 펼쳤다. 손가락이 종이를 넘기는 동작이 지나치게 익숙해서, 마치 이 도서관의 모든 책이 이미 그의 손을 거쳐 간 것처럼 보였다. "한도윤이라 합니다. 이문 자작가의 양자로 있는데, 소은 양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소." 이문 자작가라면, 최근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었던 그 집안이었다. 타국 백작가에서 폐적당한 후 이 나라로 넘어와 자작가의 양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윤소은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배경을 두고 이런저런 억측을 붙였는데, 어떤 이는 그를 비극적인 인물로, 어떤 이는 위험한 인물로 그렸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그녀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이 어째서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지 알 수 없어서, 그녀는 괜히 경계심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어떻게 제 이름을... 아세요?" 조심스레 되묻는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흔들렸는데, 한도윤은 그 물음이 재미있다는 듯 옅게 웃었다. 웃음의 결이 얇아서, 상대를 조롱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즐거워 보인다는 것을 그녀도 어렴풋이 느꼈다. "이 도서관에서 항해기와 역사서를 그렇게 열심히 빌려 가는 사람이 흔치 않으니, 사서에게 물었을 뿐이오." 그 말에 윤소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는데, 자신의 독서 취향이 누군가에게 관찰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우면서도 이상하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골라 온 책 목록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별것 아닌 일임에도 마음 어딘가를 살짝 건드리는 듯했다. '왜 그런 걸 다 물어봤을까.' 의문이 스쳤지만, 그 답을 캐물을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한도윤은 자신을 소개하며, 앞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자 이런저런 자료를 모으고 있다고 담담히 덧붙였다. 그의 말투에는 자신의 처지를 과시하거나 감추려는 기색이 없었고, 그저 사실을 나열하듯 건조했는데, 그 건조함이 도리어 신뢰감을 주는 듯했다. 작가가 되겠다는 말을 하는 순간,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반짝이는 것을 보며, 윤소은은 그가 그저 소문 속 인물이 아니라 무언가를 진심으로 좇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눈빛은 그녀가 익히 알던 귀족가 자제들의 눈빛과는 결이 달랐다. 강윤재를 비롯한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신의 지위나 재산을 언급할 때에만 그렇게 눈을 밝혔는데, 한도윤은 오직 책과 이야기를 말할 때만 그러했다. 대화는 길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각자 읽던 책의 한 대목을 두고 짧게 의견을 나누었는데, 한도윤이 언급한 구절이 정확히 윤소은이 가장 좋아했던 문장이라는 걸 알고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문장이... 마음에 드셨어요?" "몇 번이나 다시 읽었소. 배가 침몰하기 직전, 선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그 문장 말이오." '이 사람은... 나와 비슷한 걸 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더 긴 문장으로 대답을 이어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한두 마디로 끝냈을 이야기가, 어느새 그 문장이 왜 좋았는지, 어느 장면에서 왜 눈시울이 뜨거워졌는지까지 설명하고 있었다. 한도윤은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 주었는데, 그 태도가 강윤재와는 전혀 다른 결이어서, 윤소은은 낯선 온기에 오히려 당황스러워졌다. 강윤재는 언제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의견을 얹었고, 그것이 대화의 관례처럼 굳어져 있었는데, 한도윤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대화가 끊기고 다시 각자의 책으로 돌아간 뒤에도, 윤소은은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평소보다 느려지는 것을 스스로도 알아챘다. 글자를 읽고는 있었지만 정작 무슨 내용인지는 머리에 남지 않았고, 대신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종이 넘기는 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 같은 작은 것들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날 도서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한도윤이 불쑥 말을 건넸다. "이번 여름, 우리 집에서 작은 야회를 열 예정인데, 소은 양도 참석하시면 좋겠소." 야회라는 말에 윤소은은 순간 표정이 굳었는데, 사교 모임이란 그녀에게 늘 불편하고 낯선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화려한 옷차림과 낯선 시선들, 그리고 누구의 딸이니 누구의 약혼자니 하는 뒷말들이 오가는 그 공간을 떠올리자 마음이 절로 오그라들었다. "저는... 그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요." 조심스레 사양하는 말을 흘렸지만, 한도윤은 별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눈을 마주쳤다. 그 시선에는 강요의 기색은 없었으나, 물러설 생각도 없다는 것만은 분명히 담겨 있었다. "그러니 더 와야 하지 않겠소. 책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그곳엔 나밖에 없을 테니까." 그 말이 어쩐지 다정하게 들려서, 윤소은은 대답을 미룬 채 고개만 살짝 숙였는데, 마차에 오르는 길 내내 그 문장이 귓가에 맴돌았다. 창밖으로 스치는 가로수의 그림자를 보면서도, 머릿속에는 그의 목소리만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책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나밖에 없을 거라니.' 그것이 초대의 명분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의 시작인지, 그녀는 아직 구별할 수가 없었다. 낯선 남자와의 짧은 만남이 자신의 조용한 나날에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그녀는 아직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도 그의 마지막 말이 자꾸 떠올라서, 결국 대답을 정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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