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붓을 감춘 후궁

5화

알현 날 아침, 봄뜨락 궁 전체가 분주했다. 새벽부터 시녀들이 복도를 뛰어다니는 소리, 다림질 냄새, 향유 냄새가 뒤섞여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스물아홉 명의 후보들이 저마다 최고의 예복을 갖춰 입고 나섰다. 비단이며 보석이며, 걸음마다 눈이 즐거운 광경이었다. 돈 지랄 보소,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나는 그 사이에서 최대한 눈에 안 띄는 색을 골랐다. 연회색 예복, 소박한 장신구 하나. 화려함으로 승부할 생각이 없었으니 애초에 방향이 달랐다. 이 게임은 화력으로 이길 수 있는 판이 아니었다. 가문 배경도, 재력도, 아름다움도 전부 남들보다 한 수 아래였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그냥 숨는 거였다. 존재감 제로, 태그도 안 달리는 배경 캐릭터 1. 다은이 머리를 정리해주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가씨, 그래도 폐하 앞인데 조금 더..." 빗을 든 손이 머뭇거렸다. 아마 다른 아가씨들처럼 진주 장식이라도 얹어드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이대로가 좋아." "...네." 다은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거울 속의 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수더분한 인상, 눈에 띄지 않는 색감. 완벽했다. 이 정도면 스물아홉 명 중 스물아홉 번째로 기억될 자신이 있었다. 대전으로 향하는 길, 스물아홉 명의 발소리가 회랑에 울렸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옆에서 걷던 후보 하나는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계속 치맛자락을 만지고 있었고, 앞서 걷던 다른 후보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만 이상하게 여유로운 것 같아서 오히려 불안했다. 이 정도로 긴장 안 해도 되는 걸까. 사자왕 이헌. 열네 살에 즉위해 남북 이민족을 평정하고, 선왕의 부정을 숙청했다는 그 유명한 무인. 궁에 들어오기 전에도 소문은 지겹도록 들었다. 전장에서 직접 검을 들고 적장의 목을 벤다는 이야기, 반역을 도모한 귀족들을 하룻밤 사이에 몰살시켰다는 이야기, 자비 없고 감정 없는 얼굴로 사람을 죽인다는 이야기까지. 실물을 본 적은 없지만, 소문만으로도 충분히 오싹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앞에서 존재감을 최소화하는 게 내 목표였다. 간단하지만 확실한 생존 전략이었다. 대전에 들어서자 공기가 확 달라졌다. 금박으로 장식된 기둥, 붉은 융단, 그 끝에 놓인 옥좌. 천장까지 시선을 옮기니 정교하게 조각된 사자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과연 사자왕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은 남자. 멀리서도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검은 머리, 날카로운 눈매, 흐트러짐 없는 자세. 사자라는 별명이 그냥 붙은 게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한 손을 팔걸이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은 무릎 위에 얹은 채,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다. 표정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었다. 무표정, 그 자체. 후보들이 일제히 예를 갖췄다. 나도 다들 하는 대로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최대한 눈에 안 띄게. 관리가 각 후보의 가문과 이름을 하나씩 호명했다. 호명될 때마다 후보들이 짧게 인사를 올렸고, 왕은 그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몇몇 후보는 인사를 올리며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는데, 왕의 반응은 한결같이 무無였다. 소문 그대로였다. 관심 제로. 이 정도면 계획대로 잘 흘러가는 셈이었다. 내가 저 사람 눈에 띌 일은 없겠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내 차례가 되었다. "청은남작 영애, 이서윤." 나는 짧게 예를 올렸다. 고개를 든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왕의 시선이 나를 향한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이겠지. 무표정한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내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였으니까. 애초에 스물아홉 명 중에서 굳이 나를 볼 이유가 없었다. 호명이 끝나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다음 후보의 이름이 불리기까지의 그 짧은 틈, 나는 안도의 숨을 살짝 내쉬었다. 이제 남은 건 조용히 뒤로 물러나 있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내 옆에 서 있던 후보 하나가 살짝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아마 굽이 익숙하지 않은 신발이었거나, 아니면 다리가 풀린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들고 있던 예물함이 바닥에 떨어졌다. 탁! 대전 전체에 울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순간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관심받지 않기 전략, 시작 5분 만에 붕괴. 계획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예물함이 열리며 안에 있던 마법 도구 하나가 굴러나왔다. 또르르, 대리석 바닥을 타고 몇 바퀴나 굴렀다. 원래 가문의 예물로 챙겨온 소형 마력측정구였는데, 이게 왜 이 타이밍에 굴러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챙긴 게 하필 저거였다니, 하늘도 참 짓궂었다. 관리들이 당황한 기색으로 다가와 물건을 주우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옥좌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멈춰라." 대전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왕이 직접 말을 한 것이다. 첫 알현에서, 스물아홉 명 중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자왕이. 관리도, 다른 후보들도, 심지어 나조차도 순간 숨을 멈췄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됐다. "그 물건, 가까이 가져오라." 관리가 마력측정구를 집어 대전 중앙으로 가져갔다. 조심스럽게, 마치 폭탄을 다루듯이. 왕의 시선이 그 물건에서 천천히 나에게로 옮겨왔다. 느리고, 무겁고, 피할 수 없는 시선이었다.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게 뭔데, 왜 저러는데. "저것이 네 것인가."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대전 전체를 채웠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관심받지 않기. 딱 한 가지 목표를 세웠는데, 입궁 첫 알현에서 벌써 왕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고 있었다. 이건 계획에 없었다. 전혀, 없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겨우 대답했다. "예, 폐하." 내 목소리가 대전에 낮게 퍼졌다. 그리고 왕의 눈빛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착각인지 아닌지 구별할 겨를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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