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붓을 감춘 후궁

4화

입궁 준비는 정신없이 진행됐다. 예복 치수를 재고, 예절 교육을 받고, 왕실 마법 결계 통과 시험까지 치러야 했다. 특히 그 결계 시험이 문제였다. 왕궁 마도사가 손목에 팔찌 하나 채워주더니 "마력 반응을 봅니다"라며 눈을 지그시 감고 뭔가를 읽어 내려갔다. 나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혹시 내 비밀을 들키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근데 다행히도 팔찌는 그냥 삑, 소리만 내고 초록빛을 냈다. "통과입니다. 마력량은... 흠, 평범하시네요." 평범. 그 말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전에 마도사 지망생이었던 걸 생각하면 좀 서글프기도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평범이 최선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것, 그게 지금 내 유일한 생존 전략이었으니까. 그 사이 나는 조용히 내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 관심받지 않기, 눈에 띄지 않기, 최대한 태만하게 지내기. 사자왕은 정무에만 집중하고 왕비 선택엔 무관심하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 그 무관심 속에 숨어 지내면 될 것 같았다. 목표를 낮추니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다. 마도사도 못 되고 관리도 못 될 바엔, 그냥 후궁 내 최약체 캐릭터로 조용히 서식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체념도 일종의 스킬이었다. 레벨업은 못 해도 은신 스킬 하나는 만렙 찍어보자, 그런 다짐. 입궁 전날 밤, 시녀 박다은이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은은 내가 여덟 살 때부터 곁을 지킨 종자였다. 말수는 적지만 손끝이 야무진 사람. 옷가지를 개는 손길이 어찌나 꼼꼼한지, 옆에서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아가씨, 이 옷은 챙기실 거예요?" "응, 그거 챙겨." "..." 다은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몇 번 뗐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 모습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다 보니, 나도 슬슬 신경이 쓰였다. "왜, 할 말 있어?" "아니에요." "뭔데." "...아가씨는,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냐는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었다. 사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낯선 남자한테 시집가는 것도 아니고, 왕비 후보로 팔려가는 셈이니까. 근데 그렇다고 여기서 무너지면 답이 없잖아. "괜찮아야지, 별수 있나." 다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뭔가 서운한 것 같기도 하고, 걱정스러운 것 같기도 한 얼굴. 그 미묘한 거리감이 뭔지 정확히 짚어내기는 어려웠지만, 예전 같지 않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엔 내가 울면 같이 울어주고, 내가 웃으면 같이 웃어주던 아이였는데. 요즘은 자꾸 나를 조심스럽게 관찰하는 눈치였다. "저도 같이 갈 거예요, 아가씨 시녀로." "그건 알아. 다행이야, 낯선 사람들 사이에 혼자 뚝 떨어지는 것보단." "...네." 짧은 대답 뒤에 또 정적이 흘렀다. 뭔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지만, 짐 정리에 밀려 그 감각을 깊이 파고들 여유가 없었다. 옷장 서랍을 하나씩 비워내면서, 나는 속으로 다짐 하나를 더 얹었다. 다은한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내 코가 석 자니까 나중에 챙겨줄게. 다음날, 나는 정식으로 입궁했다. 왕궁의 규모는 소문대로 압도적이었다. 돌 지랄 보소. 건물 하나하나가 우리 남작가 저택 세 배는 되어 보였다. 기둥마다 금박을 입혀놨는지 햇빛을 받으면 눈이 부실 정도였고, 정원에는 이름도 모를 희귀한 꽃들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이 나라 세금이 다 여기로 들어가는구나, 싶었다. 후궁 처소인 봄뜨락 궁에 들어서니, 이미 스물아홉 명의 후보들이 모여 있었다. 명문가 딸들 특유의 여유로운 표정들 사이에서, 나는 확실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다들 어릴 때부터 이런 자리에 익숙한 사람들처럼, 부채질을 하며 서로 눈짓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저 어색하게 서서 옷깃만 만지작거렸다. "저 사람이 그 청은남작가 딸이라며." "왕명을 거스르려 했다던 그 사람?" 뒤에서 들려오는 소곤거림이 정확히 내 얘기였다. 소문이 이미 나보다 먼저 후궁에 도착해 있었다. 와, 발 빠르네. 내가 마차 타고 오는 동안 소문은 벌써 텔레포트 마법이라도 쓴 모양이었다. 한 후보가 다가와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밀색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여자였는데, 걸음걸이부터 자신감이 넘쳤다. 겉으로는 예의를 갖췄지만, 눈빛에는 명백한 하대가 담겨 있었다. "청은남작 영애시죠? 신진 귀족 출신이신데, 예법은 잘 배우고 오셨는지 모르겠네요." "배울 만큼 배웠어요." "그러시겠죠, 학문에 관심이 많으시다는 얘기는 들었으니까." 말투에 은근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마도사 지망생이라는 이력이 이곳에선 흠으로 취급받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후궁이라는 곳은 학문보다 혈통과 인맥이 통화가치를 지니는 곳이니까. 여기선 마법 이론서보다 가계도가 더 값나가는 자산인 셈이었다. 주변에서 다른 후보 몇몇도 슬쩍 이쪽을 쳐다보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딱히 대놓고 조롱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시선들이 모여서 만드는 분위기가 별로였다. 나는 애써 웃으며 인사만 받았다. 관심받지 않겠다는 전략에 굳이 이런 자리에서 힘을 낼 필요는 없었다. 그저 조용히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싸움에서 이겨봤자 얻는 건 관심이고, 관심은 지금 내가 가장 피해야 할 대상이었으니까. 다은이 뒤에서 슬쩍 내 옷자락을 잡았다. 걱정된다는 신호였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힘이, 말보다 더 많은 걸 전달하고 있었다. "괜찮아." 작게 속삭이며 안심시켰지만, 사실 나조차도 이 스물아홉 명 사이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스물아홉 명 전부가 나보다 배경이 좋고, 인맥이 넓고, 예법에도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이 게임판에서 나는 시작부터 최약체 캐릭터였다. 패시브 스킬조차 없는 순수 몸빵형. 그것도 방어력이 낮아서 한 방이면 훅 가는 유리몸. 그날 저녁, 궁 안의 관리 한 명이 처소마다 돌며 공지를 전했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남자였는데, 목소리가 유독 카랑카랑해서 처소 끝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사흘 뒤, 폐하께서 후보 전원과 첫 알현을 가지십니다. 예를 갖추고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 한마디에, 처소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몇몇은 이미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 소곤거리기 시작했고, 몇몇은 심각한 얼굴로 예법 책을 펼쳤다. 나는 그냥 멀뚱히 서서, 그 공지문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첫 알현. 사자왕과의 첫 만남. 숨어 지내려던 계획이 시작부터 시험대에 오르게 된 셈이었다. 관심받지 않기 전략의 첫 관문이 사흘 뒤로 다가왔다. 다은은 여전히 내 옷자락을 붙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손끝의 무게가, 어쩐지 사흘 뒤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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