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붓을 감춘 후궁

2화

그날 밤 나는 아버지 서재를 다시 찾아갔다. 포기가 빠른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시도는 해봐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낮에 이미 한 번 결렬된 협상을 다시 시작하는 건데, 이게 무슨 승률 높은 도박도 아니고, 그냥 자존심 싸움 같기도 했다. 서재 안은 늘 그렇듯 서늘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마법서들, 그 사이사이 놓인 마도구들이 은은하게 빛을 내며 방 전체를 푸르스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나는 항상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 다시 생각해주세요." 아버지는 책상 위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미 답이 나온 얘기다." "저는 마도사가 될 재능이 있어요. 3년 전 모의시험에서도 상위권이었고요." "안다." 알면서 이렇게 나온다는 게 더 답답했다. "그런데 왜..." "재능이 있어서 더 값이 나가는 거다." 값이 나간다. 딸을 상품처럼 취급하는 이 화법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이게 아버지랑 딸 사이에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왕비 후보들은 대개 명문가 출신들이야. 우리 가문은 재산은 있어도 격이 부족하지. 네가 그 격을 채워줄 수 있다." "저는 딸이지 담보가 아니에요." 말이 세게 나갔다. 아버지 눈썹이 살짝 올라갔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다. 감정을 안 드러내는 게 아니라 감정 자체가 별로 없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냉정함. "서윤아. 감정적으로 나오지 마라. 가문의 일이다." "가문의 일이면 왜 저만 대상이 되는 거예요? 서아도 딸이잖아요." "서아 얘기는 나중에 하자." 그 말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어야 했는데, 그때는 몰랐다. 그냥 아버지 특유의 말 돌리기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몇 마디 더 오갔지만 결국 같은 결론만 반복될 뿐이었다. 나는 논리로 아버지를 이길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계산이 끝난 사람이었고, 나는 그 계산에 들어갈 변수조차 아니었다. 결국 나는 방을 나섰다. 협상은 결렬, 완패였다. 문을 닫고 나오면서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잠깐 숨을 골랐다. 가슴 한쪽이 뻐근했다. 싸운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진이 빠지는지.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나를 찾아왔다. 아버지와 다시 얘기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기에, 이번엔 어머니를 설득해볼 참이었다. 어머니는 응접실 소파에 다리를 곱게 모으고 앉아 찻잔을 들고 있었다. 우아한 자세, 흐트러짐 없는 미소. 늘 그랬듯 완벽한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어머니,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방법이라니?" "제가 아니어도 되잖아요. 다른 가문에 저보다 어울리는..." "서윤아." 어머니가 내 말을 끊었다. 그 우아한 미소는 그대로였는데, 눈빛만 살짝 달라졌다. 뭔가 스위치가 켜진 느낌이었다.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탁. "이 얘기가 그렇게 싫으면, 다른 방법도 있긴 하지." 귀가 번쩍 뜨였다. "정말요?" 내 목소리가 너무 다급했나. 어머니 입가에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서아를 보내면 되니까."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서아. 내 동생,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앓아눕는, 그 여리고 작은 아이. 여름에는 더위를 못 견뎌서, 겨울에는 감기 한 번 걸리면 몇 주씩 앓아눕는 아이. "...뭐라고요?" "네가 정 싫으면, 서아를 대신 들여보내면 된다는 얘기다. 왕비 후보 자리가 우리 가문 몫으로 배정된 건 확정이니까, 누가 가느냐만 문제지."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마치 저녁 메뉴를 상의하는 톤으로 동생의 인생을 흥정하고 있었다. 이게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서아는 몸도 약한데, 궁에서 어떻게 버텨요! 후궁 생활이 얼마나 살벌한지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가야지." 결국 이게 목적이었다. 선택지를 두 개 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였다. 내가 가느냐, 아니면 병약한 동생을 사자굴로 밀어넣느냐. 둘 다 나쁜 선택인데 하나는 조금 덜 나쁜 선택. 어머니는 그 미묘한 차이를 정확히 계산해서 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게 협상이라고 부를 수 있나. 협박이지, 이건. "...비겁하시네요." "비겁이 아니라 현실이야." 한소영은 늘 그랬다.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오직 계산으로만 사람을 움직였다. 그게 더 무서운 이유였다. 감정은 반박할 수 있어도 계산은 반박하기 어려웠으니까.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다시 찻잔을 들며 나를 배웅하듯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이 등 뒤에 오래 남았다. 나는 그날 저녁 서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언니?"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서아는 침대에 기대앉아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작은 얼굴에 아직 앓았던 기색이 남아 있었다. 볼이 발갛고, 숨소리가 조금 거칠었다. 이불 속에서 삐죽 나온 손가락이 유독 가늘어 보였다. "괜찮아?" "응, 이제 다 나았어." 서아가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순진해서 오히려 마음이 더 아팠다. "언니, 왜 그래? 얼굴이 이상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서아 옆에 앉아서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이 아이를 후궁에 보낸다는 건, 사실상 죽으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었다. 마법 재능도 없고, 정치적 감각도 없고, 몸도 약한 아이가 명문가 규수 스물아홉 명 사이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서아는 그저 순진하게 웃으며 오늘 읽은 그림책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반쯙만 들으면서, 나머지 반은 머릿속으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 아이가 그 사자굴에서 겪을 일들을.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방을 나서면서 나는 서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언니 왜 그래애? 몬데 그렇게 봐?" "아니야, 아무것도. 잘 자." 문을 닫고 나오면서 나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나는 그날 밤 오래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다른 길이 정말 없나. 가문을 벗어나는 방법은. 도망치는 건 어떨까.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쳤지만, 결국 다 부질없는 상상에 그쳤다. 이 세계에서 가문의 결정을 거스르고 살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적어도 지금의 나에겐 없었다. 선택지는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걸 인정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다. 내가 가는 것. 그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어머니에게 짧게 말했다. "제가 갈게요." 어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만 지었다. 그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미소 뒤에,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더 남아 있다는 걸, 그때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