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붓을 감춘 후궁

3화

결정을 내린 다음 날, 도윤이 찾아왔다. 똑똑. 노크 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한도윤, 어릴 때부터 같은 사숙에서 함께 공부한 벗이었다. 부드러운 인상에 은은한 미소, 상냥함이 몸에 배어 있는 그런 사람. 마법 이론 토론을 할 때마다 나를 이겨보겠다고 밤새 공부하던 그 열정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그때는 몰랐지, 그 집념이 나중에 이런 방향으로 튈 줄은. "서윤아, 소식 들었어." "빠르네." 정말 빠르긴 했다. 아직 하루도 안 지났는데. 사숙 정보망이 왕실 정보망보다 빠른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대로 그냥 포기할 거야?"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야." "똑같은 거잖아." 도윤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걸 보니, 이 녀석 진짜 밤새 고민한 얼굴이었다. "내가 뭘 준비했는지 알아?" 그가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서명이 빽빽하게 적힌 청원서였다. 종이를 받아 든 순간,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이름들이, 익숙한 이름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사숙 동료들 서명 다 받았어. 네가 얼마나 실력 있는 마도사 재원인지, 이대로 후궁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아까운 일인지 왕실 학사원에 진정서를 넣으려고."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그걸 왜..."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네 실력을 알잖아. 이대로 묻히면 아깝잖아." 고마움과 불안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 무슨 감정의 롤러코스터인지. 고맙다는 마음 반, 제발 하지 말라는 마음 반. "도윤아, 이미 결정 난 일이야. 이걸 학사원에 넣으면..." "바뀔 수도 있어." "안 바뀌어. 그리고 이건 우리 집안 결정이야. 학사원이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고."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도윤의 눈빛이 진지했다. 순수한 선의였다. 정말 순수하게,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한 선의. 하지만 순수한 선의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었다. 세상 일이 그렇게 아름답게만 굴러가면 내가 이 고생을 왜 하고 있겠어. "제발, 이건 그냥 넘어가 줘." "서윤아." "부탁이야."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이건 아니라는 걸 전하고 싶었다. 도윤은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망설였다. 그 침묵이 길게 늘어졌다. 결국 그 자리에서 종이를 다시 품에 넣었다. 하지만 나는 그 표정에서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라는 걸 읽었다.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알겠어, 지금은.' 지금은, 이라는 단서가 붙은 눈빛.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렸는데, 별다른 조치를 취할 새도 없었다. 그리고 사흘 뒤, 예상대로 문제가 터졌다. 청원서 소식이 어찌어찌 왕실 학사원 귀에 들어갔고, 학사원은 다시 예부에 문의를 넣었고, 예부는 다시 우리 가문에 이 사실을 통보했다. 행정 절차가 이렇게 빠를 거였으면 세금 정산도 좀 빨리 해주지, 싶은 생각이 잠깐 스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지금 그런 헛소리할 상황이 아니었다. 왕비 후보로 이미 정해진 가문의 딸이, 뒤에서 학사원에 청원을 넣어 발탁을 취소해달라 요청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정확히는 도윤이 넣은 거였지만, 소문 속 주인공은 나였다. 억울하다는 말도 사치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서윤이 감히 왕명을 거스르려 했다더라." "신진 귀족 딸이 자존심만 세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지나가는 시녀들의 수다가 벽 너머로 들려왔다. 목소리를 낮췄다고 생각했겠지만, 다 들렸다. 내 이름이 저렇게 남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걸 듣는 기분이란.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듣고 나를 불렀을 때는, 그야말로 서릿발 같은 얼굴이었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등줄기가 서늘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저는 몰랐던 일이에요." "몰랐다고 넘어갈 일이 아니야. 예부에서 우리 가문의 충성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손끝이 책상을 짚었다. 그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니, 겉으로는 태연해도 속은 타들어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도윤이 혼자..." "누가 했든 결과는 같다. 우리 가문이 왕명에 불만이 있다는 인상을 남긴 거야." 맞는 말이었다. 억울해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과가 이미 나와버린 뒤에 원인을 따지는 건 아무 소용이 없었으니까. 결국 나는 도윤을 감쌀 수도, 진실을 다 밝힐 수도 없는 어정쩡한 위치에 놓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기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감정이 복잡했다. 도윤은 나를 도우려고 한 거였다. 그런데 그 선의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좋은 뜻으로 저지른 실수가 가장 처리하기 곤란한 법이었다. 화를 낼 수도 없고, 고맙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어중간한 위치. 그날 저녁 도윤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핏기가 순식간에 빠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서윤아." 목소리가 갈라졌다. "괜찮아." 안 괜찮았지만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나도 몰랐다. "내가 다 나서서 해명할게." "그러면 더 커져."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필요한 건 해명이 아니라 조용히 묻히는 거였다. "..." 도윤은 그 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떨군 채, 자기 손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이 사건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소문이라는 건 한 번 퍼지면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 누가 진짜로 청원을 넣었는지, 그 진위 따위는 이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서윤'이라는 이름 세 글자만 남아서 여기저기 굴러다닐 뿐이었다. 입궁도 하기 전에 벌써 나에 대한 이야기가 후궁 후보들 사이에 돌고 있을 게 뻔했다. '왕명을 거스르려던 신진 귀족 딸.' 입궁 첫날부터 딱지가 붙은 셈이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낙인이 찍히는 이 상황, 이걸 운이 없다고 해야 할지, 인생이 원래 이런 거라고 해야 할지. 조용히 숨어 지내겠다는 계획이,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어디까지 커질지는, 아직 나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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