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왕자의 덫과 회귀

4화

왕태자 처소에서의 생활이 열흘쯤 이어졌을 무렵, 나는 서고에서 서류를 정리하다가 다시 이헌과 마주쳤다. 그 우연이 벌써 세 번째라는 걸 깨닫고는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간지러웠다. '이 정도면 우연이라고 하기엔 좀 많은데.' 궁궐이라는 곳이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공간이라지만, 왕태자와 말단 궁인이 열흘 사이 세 번이나 같은 서고에서 마주치는 건 통계적으로도 이상한 일이라고 나는 속으로 진지하게 따져보았다. 물론 그런 걸 따지는 내가 더 이상하다는 결론에 금방 도달하긴 했지만. 서고 안쪽 서가에는 오래된 문서 더미가 사람 허리춤까지 쌓여 있었는데, 그걸 옮기려고 팔을 뻗던 나는 발밑에 깔린 두루마리를 미처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밟았다. 몸이 순식간에 기울었고, '이대로 넘어지면 서류가 다 뒤엉키는데, 다시 정리하려면 야근 확정인데' 하는 생각이 넘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도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와중에도 상자를 먼저 걸리적거리지 않게 옆으로 치우려던 게 문제였는지, 몸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려는 찰나 뒤에서 누군가 서류 상자를 붙잡아준 덕분에 겨우 넘어지는 걸 면했다. 고개를 돌리자 이헌이 무표정한 얼굴로 상자를 다시 내 손에 얹어주고 있었다. 그 손끝이 상자 모서리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순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던 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을 것이다. "조심해라." 그 짧은 두 글자에 담긴 걱정을 나는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는데, 그가 이미 등을 돌리고 걸어가버린 뒤에야 방금 그 순간이 얼마나 신경 쓰였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손에 든 상자를 괜히 한 번 더 고쳐 안으며, 그가 사라진 서가 사이 통로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서 있었다. '방금 그거, 걱정한 거 맞나. 아니면 그냥 서류가 상하는 게 아까워서 그런 건가.' 결론이 나지 않는 질문을 붙들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그 한심함조차도 어쩐지 나쁘지 않았다. "왕태자 전하가 서고에는 왜 그렇게 자주 오시는 걸까요?" 내가 넌지시 묻자, 함께 일하던 상급 시녀는 붓끝에 먹을 묻히며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원래 서류 좋아하시잖아. 밤에도 여기서 지새우실 때가 많아. 침전보다 여기서 잠드신 날이 더 많다는 말도 있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한 번 으쓱했는데, 그 태연함이 나에게는 오히려 낯설게 다가왔다. 나는 그 대답을 들으며 그가 자주 이곳에 오는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그의 습관 때문이라는 걸 확인했으면서도, 어쩐지 그 사실이 살짝 서운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뭘 기대한 거야.' 스스로를 향한 야유가 자동으로 튀어나왔지만, 그럼에도 그날 이후로 서고에서 그와 마주치는 순간을 은근히 기다리게 됐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서류를 정리하다가도 문 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면 괜히 고개를 들어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대부분은 다른 관원이거나 심부름 온 궁인이었고 나는 그럴 때마다 김이 빠진 표정을 숨기려 애썼다. '이러다 서고 문지기 시녀로 소문나는 거 아닌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실없이 웃었다. 며칠 뒤 늦은 밤, 나는 처소 정리를 마치고 뒤뜰을 지나다가 등불도 없이 홀로 앉아 있는 이헌을 발견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옆얼굴은 유난히 또렷하게 도드라져 보였는데, 달빛이 그의 콧날을 따라 흐르다가 턱선에서 멈추는 모양이 마치 세공된 조각처럼 완벽해서, 나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조금 더 오래 눈에 담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그가 밤공기를 쐬러 나온 건지, 그저 처소 안이 답답해서 나온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예를 표하고 조용히 지나가려다 그가 먼저 말을 건 것에 걸음을 멈췄다. "불편하지 않으냐, 이곳 생활이." 뜻밖의 질문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사실대로 답했다. "조금은 낯섭니다만, 견딜 만합니다." 견딜 만하다는 대답이 궁궐 사람 특유의 형식적인 겸양처럼 들릴까 걱정했는데, 그는 오히려 그 대답에 옅게 웃음을 지었다. 처음 본 그의 웃음이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정도의, 남들은 눈치도 못 챌 만큼 작은 미소였지만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어야 했다. "다들 견딜 만하다고 말하지, 정작 견디지 못해 나가는 이들이 태반이면서." 그의 말투에 담긴 자조가 나와 닮아 있어서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는데, 이 냉정하다고 소문난 왕태자도 결국 이 궁궐이라는 구조 안에서 나와 비슷한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걸 그 순간 처음으로 실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조금 떨어진 자리에 시선을 두고 물었다. "그렇게 나가는 이들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글쎄, 나도 모른다. 나가는 순간 이곳 사람들의 기록에서 사라지니까." 대답이 건조했지만 그 안에 담긴 씁쓸함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전하께서도 견디시는 겁니까." 조심스레 되물은 질문에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짧게 답했다. "견디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 대답이 유독 오래 마음에 남았고, 나는 그날 밤 처소로 돌아가는 길 내내 그 문장을 곱씹었다. 발걸음마다 그 말이 밟혔다. '견디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으니.' 나는 그 말을 되풀이하다가, 어쩐지 그게 나에게도 하는 말처럼 들려서 걸음을 몇 번이나 멈추었다. 그 무렵부터 이강도 후원이나 복도에서 나를 마주칠 때마다 스스럼없이 다가와 안부를 물었는데, 처음에는 그저 그의 성격이라 여겼던 친근함이 어느새 나만을 향한 특별한 관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강은 걸음걸이부터 시원시원해서,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이 마치 봄바람이 앞서 걸어오는 것 같았다. "오늘은 좀 지쳐 보이는데." 그가 내 얼굴을 살피며 던진 말에 나는 놀라서 시선을 피했고, 그 반응을 본 이강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작은 간식거리를 손에 쥐여주고 사라졌다. 손바닥에 남은 온기와 종이에 싸인 과자 부스러기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러면 내가 자꾸 기대하게 되잖습니까." 다음에 마주쳤을 때 내가 반쯤 장난으로 던진 말에 이강은 눈을 크게 뜨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대해도 돼. 나는 원래 정 많은 사람이라." 그렇게 말하며 그는 팔을 활짝 벌려 보이는 시늉을 했는데, 그 과장된 몸짓이 어쩐지 웃음을 자아냈다. 그 다정함이 진심인지 그저 그의 습관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궁궐 생활에서 처음으로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데워지는 걸 느꼈다. 한편 이헌과의 마주침은 점점 더 잦아졌는데, 그게 정말 우연인지 아니면 그가 일정을 조율해서 만들어낸 자리인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서고에서, 뒤뜰에서, 심지어 처소 복도 모퉁이에서까지 나는 몇 번이나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럴 때마다 그는 짧은 인사만 남기고 지나갔지만 나는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도 하루의 온도를 바꿔놓는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은 복도 모퉁이에서 그와 정면으로 마주쳤는데,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지나가면서도 시선만은 잠깐 나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그 짧은 순간의 눈맞춤이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는 걸 인정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거 그냥 착각이겠지.'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이 반복되는 마주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이헌의 무심한 얼굴 뒤에 숨은 것이 무엇인지, 이강의 다정함 뒤에 숨은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점점 더 깊이 이 궁궐의 흐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줄다리기의 시작인지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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