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왕자의 덫과 회귀

2화

그날 밤, 배정 소식을 안고 잠들지 못한 채 뒤척이다가 나는 자연스럽게 몇 달 전 그 종이를 처음 받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손에서 겨우 마른 잉크 냄새가 남아 있던 통지서를 몇 번이나 접었다 펴며 걸었던 그 골목길, 발걸음이 뛰다시피 빨라졌던 것도 결국 이 소식이 아버지의 표정을 조금이라도 바꿔줄 거라는 헛된 계산 때문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계산 자체가 얼마나 유치했는지 헛웃음이 났다. '누가 보면 무슨 과거 급제라도 한 줄 알겠다.' 나는 이불 속에서 혼자 코웃음을 쳤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건 응접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다과를 즐기고 있던 계모 박선영과 이복동생 한세아였다. 두 사람 앞에는 내가 몇 달 동안 구경도 못 해본 화과자가 접시 가득 쌓여 있었고, 나는 그 접시를 보는 순간 잠깐 배가 고팠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곧 그런 생각을 접었다. 지금 배가 고픈 게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통지서를 꺼내 들며 소식을 전했다. "어머니, 저 궁녀로 발탁됐어요." 어머니라는 호칭이 입에서 나올 때마다 어색함이 목구멍에 걸리는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조금이라도 좋은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게 사실이다. 박선영은 찻잔을 든 채 나를 힐끗 보더니 별 감흥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궁녀? 그거 시녀 아니니?" 시녀라는 단어를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는 건 이 성취를 하찮게 여긴다는 뜻이었고, 나는 그 순간 이 집에서 내가 무엇을 이루든 결과는 항상 똑같을 거라는 예감이 스쳤다. 박선영은 그마저도 흥미가 다 떨어졌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화과자로 손을 뻗었는데, 그 손짓 하나가 나에게 하는 어떤 말보다도 더 정확한 대답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세아가 곧바로 끼어들며 손에 쥔 부채로 나를 가리켰다. "언니가 그런 것도 돼? 신기하네." 세아는 부채를 접었다 펴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는데, 그 눈길이 마치 시장에서 물건 값을 매기는 것 같아서 나는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 말투에 담긴 비웃음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나는 둔감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 억울했지만 표정을 관리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서 왜 또 기대를 했지.'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나무라며 통지서를 다시 접었다. 접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그게 화가 나서인지 억울해서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서재에 있던 아버지 한기석을 찾아갔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류에 파묻혀 있던 아버지는 내가 문을 두드리자 고개를 살짝 들었을 뿐, 통지서를 건네는 내 손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책상 위에는 이름도 모를 관직들이 적힌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아버지의 붓끝은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래, 잘됐구나." 잘됐다는 세 글자가 이렇게 무성의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고, 아버지의 시선이 곧바로 서류로 되돌아가는 걸 보며 이 집에서 내가 존재감을 얻는 방법은 궁녀 발탁 따위로는 절대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오히려 궁궐 발령을 두고 이 집안이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득을 계산하는 데 더 관심이 있어 보였는데, 붓을 든 손을 멈추고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모습이 딱 그 계산 중이라는 증거였다. 그 계산이 끝나고 나서야 짧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가서 실수하지 말아라. 이 집안 이름에 먹칠하면 안 되니까." 그 한마디가 격려인지 경고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건조했다. 나는 그냥 고개를 숙이고 서재를 나섰는데,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아버지는 나를 한 번도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길에 마주친 이복 남동생 한태민은 마당에서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놀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뜬금없이 웃으며 소리쳤다. "누나 이제 궁궐 가? 거기 맛있는 거 많대!" 태민은 나뭇가지를 창처럼 휘두르다가 나를 향해 겨누는 시늉을 하며 깔깔 웃었고, 그 웃음소리가 마당을 채우는 동안만큼은 이 집이 조금 덜 무겁게 느껴졌다. 태민의 그 순수한 반응이 오히려 위로가 됐다는 게 조금 씁쓸했는데, 적어도 이 집에서 나를 향한 악의 없는 말은 태민에게서만 나온다는 사실이 그날 밤 이불 속에서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온기였다. 나는 태민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서야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방구석에 놓인 어머니 장미란의 작은 유품 상자를 꺼내 열었고, 빛바랜 머리 장식 하나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오늘 이 소식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해보았다. 상자 안에는 머리 장식 말고도 손수건 한 장과 낡은 노리개가 더 있었는데,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 순서대로 손바닥 위에 늘어놓고서 마치 어머니의 흔적을 다시 조립하려는 사람처럼 한참을 들여다봤다. '엄마라면 분명 안아줬을 텐데.' 그 상상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나는 곧 상자를 닫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차피 상상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다음 날 아침 세아는 내 방까지 찾아와서 내가 쓰던 문양 빗을 자기 것이라며 가져갔는데, 그 빗을 손에 쥐고 방을 나서면서도 세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 빗이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물건 중 하나라는 걸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해봐야 돌려받지 못할 거라는 걸 이미 수십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남은 서랍을 뒤져 혹시 세아가 놓친 것이 더 있는지 확인했는데, 다행히 손수건과 노리개는 상자 깊숙이 숨겨둔 덕에 무사했다. '적어도 이건 지켰다.' 그 작은 안도감이 그날 아침 내가 얻은 유일한 승리였다. 그렇게 짐을 꾸리던 며칠 동안 나는 이 집에서 벗어난다는 사실 하나로 스스로를 위로했고, 궁궐이라는 낯선 곳이 오히려 더 안전할 거라는 기묘한 확신을 품었다. 보따리에 옷가지를 넣으면서도, 유품 상자를 몇 번이고 다시 열어 확인하면서도, 나는 이 집의 사람들이 나를 잊어주기를 바라는 동시에 조금은 붙잡아주길 바라는 모순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확신이 얼마나 얕은 계산이었는지 알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짐을 다 꾸리고 대문을 나서던 날, 배웅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잠깐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혹시라도 누군가 창문 너머로 손이라도 흔들어줄까 기대했지만, 창문은 하나같이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등 뒤로 닫히는 대문 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날의 그 조용한 대문 소리가, 나중에 돌이켜보면 내가 이 집안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걸어 나온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그 조용한 대문 소리보다 훨씬 더 무거운 소리들이 궁궐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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