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왕자의 덫과 회귀

1화

궁녀 숙소의 아침은 언제나 종소리보다 먼저 오는 발소리로 시작되었는데, 나는 그 소리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넘겨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취업만 하면 다 해결될 줄 알았지.' 입궁한 지 석 달째, 나는 여전히 이 거대한 궁궐의 구조를 절반도 파악하지 못한 채 매일 아침 길을 헤매는 신입이었고, 어제도 동쪽 회랑과 서쪽 회랑을 헷갈려서 물 항아리를 든 채로 반대편 끝까지 걸어갔다가 되돌아와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옆방 시녀 김보라가 나보다 반년 먼저 들어와서 요령을 알려준다는 점이었는데, 그 요령이라는 것도 대부분 '누구 눈에 걸리면 무조건 죄송하다고 해라'는 식의 생존 전략에 가까웠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세면대 앞에 서서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순간,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아버지가 이걸 보면 뭐라고 할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눈 밑에 옅게 앉은 그늘과 며칠째 제대로 못 잔 탓에 푸석해진 머릿결까지, 거울 속 얼굴은 딱 사흘 밤낮 야근한 말단 관리 같았다. 평민 출신으로 백작위를 받은 집안이라는 게 이렇게 애매한 위치인 줄은 몰랐는데, 정통 귀족들 눈에는 여전히 벼락출세한 촌뜨기 취급을 받았고 그렇다고 평민들 사이에서는 이미 다른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처지였으니, 궁녀가 된다는 건 그 애매함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발버둥이었다. '중간관리자만큼 애매한 자리도 없다더니, 딱 우리 집안 얘기네.' "서윤아, 오늘 배식 순번 바뀌었대." 보라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소식을 전했을 때, 나는 옷고름을 매다 말고 그녀를 돌아보며 이번엔 또 뭐가 문제인가 싶어 한숨부터 나왔다. 궁궐에서의 하루하루는 크고 작은 순번 변경과 잡무 배정으로 채워졌고, 그 틈에서 아무 사고 없이 하루를 넘기는 게 신입 궁녀의 유일한 목표였는데, 문제는 그 사고라는 게 대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온다는 점이었다. "바뀐 게 뭔데." 내가 옷고름을 마저 매며 되묻자 보라는 마치 대단한 비밀을 전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너 왕태자 전하 처소로 배정될 수도 있대. 상궁 마님이 눈여겨보고 계신다더라." "그게 나한테 좋은 소식이야, 나쁜 소식이야?" 내가 묻자 보라는 팔자 눈썹을 하고 손사래를 쳤다. "그걸 누가 알아. 좋은 자리긴 한데 그만큼 눈에 잘 보이는 자리기도 하니까." 그녀는 마치 축하와 애도를 동시에 전하는 사람처럼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 표정만으로도 이게 그다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왕태자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나는 손끝이 살짝 굳는 걸 느꼈는데, 그건 기대감이라기보다는 이 거대한 조직 안에서 갑자기 눈에 띄는 자리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순수한 불안이었다. 회사로 치면 갑자기 대표이사 비서실로 발탁된 셈이었고, 나는 그런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입궁을 결심한 건 순전히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가 재혼을 서두르고, 그 새어머니가 데려온 것도 아니고 새로 낳은 쌍둥이가 집안의 중심이 되어가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어떻게든 이 집에서 존재감을 인정받을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 방법이 하필 궁궐이었던 것뿐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바빴고, 쌍둥이 동생들이 태어난 뒤로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조차 줄어들었는데, 그 미묘한 서열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내가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나도 스펙 쌓기에 매달린 취준생이었네.' 이런 생각이 스칠 때마다 나는 스스로가 조금 우스워졌지만, 그렇다고 다른 선택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후회할 여유조차 없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배정된 구역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나는 오늘도 이 긴 복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밟히지 않기만을 바랐는데, 그 바람은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복도는 유난히 길었고, 양쪽으로 늘어선 기둥마다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어서 그 사이를 지날 때마다 마치 시험대 위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청소 도구를 든 궁녀들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나는 괜히 시선을 아래로 깔았는데, 그건 겸손이 아니라 순전히 눈을 마주쳤다가 괜한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였다. "이거 네가 놓친 거지?" 상급 궁녀 하나가 내 앞으로 깨진 도자기 조각을 툭 던지며 물었을 때, 나는 그 도자기를 만진 적조차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곧바로 반박할 수 없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서는 발언권의 크기가 곧 신분의 크기였고 나는 아직 그 크기가 손톱만큼도 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도자기 조각은 그녀의 발치에서 튕겨 나와 내 발끝에 닿았고, 나는 그 파편이 원래 있던 자리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만." 겨우 내뱉은 대답에 상급 궁녀는 코웃음을 치며 등을 돌렸고,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이건 억울함이라기보다는 그냥 이 조직의 룰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여기서 감정을 다 표현하고 살면 하루도 못 버틴다는 걸 벌써 배운 뒤였다. '누명이라는 것도 결국 위계의 부산물이지.' 나는 쭈그려 앉아 조각을 주워 담으며 생각했고,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아예 반박도 하지 말고 그냥 쓸어 담기부터 하자고 다짐했다. 오후에는 세탁장에서 이불을 나르는 잡무가 배정되었는데, 젖은 천을 몇 번이나 옮기고 나니 팔이 뻐근했고, 그 와중에도 보라는 옆에서 계속 말을 걸어왔다. "너 진짜 왕태자 전하 뵌 적 있어?" "멀리서 뒷모습만." "어때, 소문대로 무섭게 생겼어?" "몰라, 뒷모습만 봤다니까." 우리는 그렇게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이런 잡담이야말로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윤활유였다. 궁궐 안의 소문은 늘 부풀려지기 마련이었고, 왕태자에 관한 이야기도 냉혹하다는 말과 무심하다는 말이 뒤섞여 도는 정도로만 나는 알고 있었다. 오후 늦게 상궁이 나를 따로 부른 건 그날의 유일한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작은 방 안에서 상궁은 서류 하나를 내 앞으로 밀어 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태자 전하 처소로 옮기게 될 거다. 실수 없이 처신해." 방 안에는 향이 옅게 타고 있었고, 창밖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서류 위에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종이에 적힌 몇 줄의 글자를 읽는 동안 나는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는 걸 느꼈는데, 그게 기대인지 두려움인지는 스스로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언제부터입니까." 내가 묻자 상궁은 서류를 정리하며 짧게 답했다. "내일부터. 짐은 오늘 밤 안에 옮겨둬라." 너무 갑작스러운 통보였지만, 이곳에서 통보는 늘 이런 식이었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드디어 뭔가 되는구나' 싶은 마음과 동시에, 왕태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겁고 위험한 자리인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방을 나서면서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종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방을 나오면서, 이 배정이 내 인생에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그때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복도 끝에서 보라가 손을 흔들며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과 부러움이 반씩 섞여 있었고,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로, 그날 밤 짐을 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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