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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복도를 걸으며 나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갈까 고민했다. 낮에 있었던 일—그 성녀라는 여자와 강도윤이 나란히 서 있던 그 광경—을 떠올리면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 앞에서 대놓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나라의 수상이자 냉철하기로 유명한 이헌 공작.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존재라지만, 나에게는 그저 딸의 안부보다 국사가 우선인 아버지였다. 그런 사람 앞에서 감정을 먼저 드러내는 건, 살면서 배운 것들 중 가장 확실하게 손해 보는 짓이었다. 서재 문을 두드리자 낮은 목소리가 들어오라 했다. 문을 열며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오늘 낮의 일을 곧장 꺼내지는 않을 것. 감정이 아니라 정보를 캐내는 자리로 만들 것. 말은 쉬웠다. 문제는 항상 실천이었지. "성녀에 대해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마치 그저 궁정 소식에 관심 있는 딸처럼 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아버지가 대체 왜 저 여자를 왕궁에 들여놓았는지, 왜 하필 강도윤을 붙여놓았는지부터 캐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목소리랑 속마음이 이렇게 따로 노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오늘은 유독 그 간극이 크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나를 힐끗 보았다. 그 시선이 딱 반 박자, 딸을 향한 게 아니라 정치적 변수를 훑는 시선처럼 느껴져서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역시. "네가 궁금해할 만한 인물이긴 하지. 그런데 정확히 뭐가 궁금하냐."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뭐가 궁금하냐니. 다 궁금하다고 말하면 너무 없어 보이니까, 나는 최대한 정리된 문장을 골랐다. "그 여자가 왜 왕실에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위치에 서게 될지요." 아버지는 서류를 정리하며 담담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두 달 전, 왕궁 뒤편 결계석 근처에서 갑자기 나타난 여자였다고 했다. 이 세계의 말과 예법을 전혀 몰랐으며, 다만 놀랍게도 손끝에서 정화의 기운을 내뿜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정화가 아니라, 최근 수도 근방에 퍼지고 있는 역병의 근원인 마기를 완전히 씻어낼 수 있는 힘이었다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해가 너무 잘 됐다. 국왕이 그런 존재를 손에서 놓을 리 없다는 것도, 아버지 같은 정치가가 그 힘의 실용성만 보고 다른 문제는 눈감아준다는 것도, 다 뻔한 그림이었다.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편리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였지만, 뭐, 이 세계가 나한테 개연성을 지켜준 적이 있었던가. 그냥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기사단장을 붙이신 건가요." 나는 애써 목소리를 낮게 유지하려 애썼다. 그런데 마지막 어절에서 살짝 떨림이 나왔던 것 같다. 아, 망했다. 감정을 안 드러내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아버지는 그런 나를 잠시 응시했다. 그 시선이 꽤 길게 느껴졌는데, 딸의 동요를 읽어내는 시간이었는지, 그저 다음 말을 고르는 시간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내 아버지가 짧게 대답했다. "강도윤뿐 아니라 다른 귀족가의 자제들도 여럿 선발되었다. 그게 문제가 되느냐." 문제가 되느냐니. 그 말이 오히려 더 문제였다. 마치 내가 지금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고 있다는 투였는데, 사소한 게 아니잖아, 이거.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물었다. "그 사람들 중 상당수가 혼약이 있는 상태인데도 말이죠." 아버지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혼약은 개인 사정이고, 성녀의 안전은 국가의 사정이다." 그 문장이 서재 안 공기를 그대로 얼려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잠깐 숨을 골랐다. 개인 사정과 국가 사정. 그 두 단어 사이의 거리가, 딱 내 자리를 규정하는 거리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이 집안에서 내가 얼마나 부속품 같은 존재인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공작가의 외동딸이라는 게, 국왕의 조카라는 게, 결국은 다 정치적 자산으로서의 가치일 뿐이라는 걸. 어릴 때부터 예법 수업 시간마다, 사교계 데뷔 준비를 할 때마다, 심지어 혼약이 정해질 때조차 그걸 모른 척 넘긴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걸 아버지 입으로, 이렇게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말투로 직접 확인받는 건 또 다른 종류의 서늘함이었다. 머리로 아는 것과 심장으로 들이받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알겠습니다. 궁금한 건 다 해소됐어요." 나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서재를 나왔다. 속으로는 뭔가 걸쭉한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그걸 삼키는 것도 훈련의 결과였다. 이래서 어른들이 참는 게 이기는 거라고 했나. 별로 이기는 기분은 아니었지만. 복도를 걸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럼 나는 지금 뭘 해야 하는 걸까. 그저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 걸까. 강도윤이 그 여자 곁을 지키는 걸, 혼약자로서의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눈만 뜨고 봐야 하는 걸까. 그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노려보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이대로 얌전히 있으면 나는 그냥 정치적 방편으로 옆에 붙어 있다가 언젠가 조용히 밀려나는 장식품이 될 것이고, 뭔가를 하겠다고 나서면 또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는데. 그런데 가만있는 것도 이제는 뭔가 억울했다. 삼 년이었다. 삼 년을 별다른 애정 없이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며 지내온 사이였는데, 이제 와서 그 예의마저 무너지는 걸 그냥 지켜만 보라고? 다음 날 아침, 나는 강도윤에게 짧은 서신을 보냈다. 이번 주 안에 시간을 내어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문장을 쓰는 데만 세 번을 고쳐 썼다. 너무 다급해 보이면 안 되고, 너무 무심해 보여도 안 됐다. 딱 적당한 온도로, 혼약자로서 당연히 물을 수 있는 정도의 요청처럼 보이도록. 답장은 반나절이 지나서야 왔다. 그 내용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결했다. '임무 중이라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딱 그 한 줄이었다. 인사도 없고, 다음에 시간을 내겠다는 여지도 없고, 그냥 그 한 줄로 끝이었다. 나는 그 서신을 손에 쥐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느껴졌는데, 이게 화가 나서인지 상처를 받아서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둘 다였을 것이다. 화도 나고 상처도 받고, 그 두 감정이 동시에 치밀어 올라서 뭐부터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아니 이건 무섭다기보다는 그냥 서러운 건가. 삼 년을 함께 지낸 사이였다. 물론 서로 열정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정략으로 맺어진 혼약이었고, 서로 애틋한 감정을 기대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는 지켜왔던 사람이었다. 내가 서신을 보내면 늦더라도 답을 했고, 행사에서 만나면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고, 최소한 나를 없는 사람처럼 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최소한의 예의마저 무너지고 있다는 게, 그것도 이렇게 대놓고, 마치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이 무너지고 있다는 게 견디기 어려웠다. 딱 한 줄. 그 한 줄로 나는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정확히 통보받은 셈이었다. 나는 서신을 서랍에 넣었다. 서랍을 닫는 손이 미묘하게 떨렸는데, 그게 분해서인지 아니면 뭔가 결심을 하고 있어서인지 나조차 헷갈렸다. 그래,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방법을 바꿔야겠지. 서랍을 닫으며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얌전히 서신이나 보내고 기다리는 건, 오늘부로 그만두겠다고.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답장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남을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 방법이 뭐가 될지 나조차도 아직 정하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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