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단장님, 성녀만 보이세요?

1화

창밖으로 정원사가 장미 넝쿨을 다듬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오는 아침이었다. 나는 찻잔을 들고 창가에 앉아 그 풍경을 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평화로운 아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나조차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흩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이 평온함이 딱 오늘까지일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감이었다. 그런데 그 감이라는 게, 여태껏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지. 요즘 왕실에서 도는 소문 하나 때문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여자가 국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처음엔 그저 우스갯소리로 넘겼던 그 이야기가 이제는 매일 아침 시녀들의 입방아에까지 오르내리고 있었으니, 웃어넘길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세계에서 왔다는 것도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소리인데, 그런 말이 벌써 두 달째 사그라들지 않고 오히려 몸집을 불려가고 있다는 게 더 웃긴 일이었다. "아가씨, 오늘 기사단 훈련장에 가보시는 게 어떨까요." 시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는데, 그 조심스러움 자체가 이미 뭔가를 암시하고 있었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시녀는 눈을 피하며 대답을 흐렸다. 시선이 창밖으로, 그다음엔 바닥으로, 그다음엔 다시 창밖으로. 그 눈동자가 갈 곳을 못 찾고 헤매는 걸 보면서 나는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강도윤이 관련된 일이구나, 짐작이 갔다. 내 혼약자이자 왕실 기사단장인 그 사람이 요즘 훈련장보다 다른 곳에 더 자주 있다는 소문을 들은 지 벌써 열흘째였다. 처음엔 그저 임무 때문이겠거니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원래도 말이 없고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삼 년을 봐온 사람인데 그 정도는 안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시녀들이 눈을 피하는 방식이, 하녀장이 내 앞에서 유독 말을 아끼는 태도가, 심지어 어제는 마부까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게 보였는데. 전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이건 그냥 소문이 아니라 온 저택이 다 알고 나만 모르는 일이라는 뜻이다. 아니, 이 상황 뭔가 익숙한데. 드라마에서 이런 전개 많이 봤던 거 같은데, 설마. 나는 결국 옷을 갈아입고 마차를 준비시켰다. 확인하지 않고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하녀가 옷을 입혀주는 내내 손이 조금 떨렸는데, 이게 긴장인지 화인지 나도 헷갈렸다. 아마 둘 다였겠지. 마차 안에서 창밖을 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설마 그 이세계에서 왔다는 성녀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지. 왕실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두 달이 되었다는 그 여자, 유아라. 이름조차 낯설게 들리는 그 사람이 강도윤과 무슨 상관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마차 바퀴가 돌길에 부딪히는 소리마다 심장이 따라 덜컹거리는 게, 이런 게 불안이라는 감정인가 보다 싶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유아라가 왕실에 들어온 시점과 강도윤의 태도가 변한 시점이 얼추 겹친다는 것. 국왕이 그 여자를 유독 아낀다면서도 굳이 기사단 근처에 머물게 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강도윤이 최근 들어 나를 대할 때 유독 사무적으로 변했다는 것. 원래도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예의는 지키던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그 예의마저 뭔가 억지로 걸치고 있는 옷처럼 느껴졌다. 훈련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 여자를 직접 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하얀 피부를 가진 이국적인 외모였는데, 이 나라 사람이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색감이었다. 그러니까 저게 소문의 그 이세계인이구나. 실제로 보니 소문보다 더 눈에 띄었다. 이런 외모라면 안 그래도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만하다 싶었다. 그리고 그 여자 옆에 강도윤이 서 있었다. 그가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꼈는데, 이상한 건 그가 나에게는 그렇게 웃어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약혼한 지 삼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말이다. 삼 년. 서른여섯 달. 그 시간 동안 내가 본 강도윤의 표정은 대체로 무표정, 가끔 미간을 좁히는 정도였는데, 지금 저건 뭐지. 눈매가 저렇게 부드러워질 수 있는 얼굴이었나. 처음 보는 표정이라 낯설기까지 했다. "이서린 영애." 강도윤이 나를 발견하고 예의를 갖춰 인사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방금 전 웃음의 온도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웃음 스위치가 나만 보면 자동으로 꺼지는 건가, 그런 기능이 탑재되어 있다면 참 편리하겠다 싶었다. 물론 나한테는 전혀 편리한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기사단장님께서 새로운 임무를 맡으셨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겉으로는 차분했지만 속으로는 이 인간이 지금 나를 상대로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어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임무 좋아하시네. 저게 임무면 나는 지금 국경 순찰이라도 나가야 할 판이었다. 유아라가 그 순간 나를 향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당신이 강도윤 님의… 약혼자인가요." 이 나라 말투와는 어딘가 다른, 딱딱하면서도 낯선 억양이었다. 발음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게 조립된 문장 같았는데, 그게 오히려 더 신경을 긁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지만, 그 짧은 순간 그녀의 눈빛에서 읽은 건 순수한 호기심도 아니었고 미안함도 아니었다. 그저 무심함. 이 여자는 자신이 뭘 건드리고 있는지조차 모르는구나, 그 생각이 들자 오히려 화가 나기보다는 서늘한 예감이 밀려왔다. 차라리 미안해하는 표정이었으면 덜 무서웠을 텐데. 저건 그냥,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방금 처음 인지한 얼굴이었다. 삼 년짜리 약혼자가 이 정도 취급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그마저도 삼켰다. "네, 맞아요." 내가 짧게 대답하자 유아라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강도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더 소름 끼쳤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시선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강도윤이 급히 자리를 정리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고 했고, 유아라는 순순히 그를 따라나섰다. 뒤도 안 돌아보고.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강도윤은 나를 향해 짧게 목례만 하고는 그녀와 함께 걸음을 옮겼는데, 두 사람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맞아 들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서로 발을 맞추려고 애쓰는 기색도 없이 그냥 저절로 맞는, 그런 익숙함이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마차로 돌아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부가 몇 번 눈치를 보며 뭐라 말을 걸려다 그만두는 게 느껴졌지만, 그럴 만도 했다. 지금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인지 나도 짐작이 갔으니까. 집에 도착해서야 겨우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인 것 같은데."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아서도 그 장면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강도윤의 웃는 얼굴. 유아라의 무심한 눈빛. 그리고 나를 향한, 온도가 사라진 인사. 셋 다 따로 놓고 보면 별일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셋이 한자리에 모이니까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설마 진짜 그런 건 아니겠지. 삼 년을 함께한 약혼자가, 아무리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도, 그렇게 쉽게 마음이 옮겨갈 수 있는 건가. 아니, 애초에 그 사람 마음에 나라는 존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적이 있긴 했나. 이 질문까지 가니까 오히려 더 무서워졌다. 확신이 없다는 것, 그게 제일 무서운 거였다. 하녀장을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텐데, 오늘 아침 그렇게까지 말을 아끼던 걸 보면 분명 뭔가 있었다. 그런데 막상 부르려니 손이 멈췄다. 알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모르는 채로 있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비겁한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나는 확인하지 않고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니 결국은 알게 될 것이다. 다만 그게 오늘 밤이 될지, 내일 아침이 될지, 아니면 이미 늦어버린 뒤일지는 알 수 없었다. 창밖으로 다시 정원사의 가위질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 사각. 아까와 똑같은 소리였는데, 이제는 그 소리가 왜인지 불길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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