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청하 공작가의 마차 안에서 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도의 거리는 여느 때처럼 붐볐다.
행상들의 외침과 마차 바퀴가 돌바닥을 긁는 소리, 그 틈으로 스며드는 빵 굽는 냄새까지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이제 와서.'
선유헌과의 혼약은 내가 철도 들기 전에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청하 공작가는 대대로 왕실의 마력을 보완해온 가문이었다.
그 역사만 해도 백 년이 넘었고, 가문의 이름 뒤에는 늘 '왕실의 방패'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광마법이라는 특수한 계통은, 다른 이의 마력 흐름을 안정시키고 증폭시키는 데 유용했다.
세간에는 화려한 공격마법이나 방어마법만이 주목받았지만, 실상 왕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마력의 폭주와 고갈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 중, 가장 순도 높은 광마력을 지닌 존재였다.
어릴 적 아버지는 나를 마력측정실로 데려간 날을 기억하고 계셨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과 천장까지 이어진 마법진, 그 중심에 놓인 측정 구슬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측정 구슬이 새하얗게 빛나던 순간, 아버지의 표정이 처음으로 흐트러졌다고 들었다.
그 흐트러짐이 기쁨이었는지, 부담이었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 아이라면 왕태자를 지탱할 수 있다."
그 한마디로 나의 미래는 정해졌다.
여섯 살의 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아버지의 목소리에 담긴 무게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원망할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다잡았기 때문이다.
귀족가의 딸로 태어난 이상, 가문의 필요에 맞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태생의 문제였고, 나는 그 태생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을 쓰지 않았다.
선유헌은 왕위 계승자였지만, 마력만큼은 역대 왕태자 중 최저였다.
마법이 국력의 근간인 예람 왕국에서, 그 사실은 곧 왕권의 취약함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왕실은 그 결함을 감추기 위해 나를 선택했다.
표면적으로는 정략혼약, 실질적으로는 보좌였다.
나는 그의 곁에서 마력이 불안정해질 때마다 광마법으로 흐름을 안정시켜야 했다.
그 일은 아무도 모르게 이루어져야 했다.
왕태자의 약점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순간, 그것을 노리는 세력이 생길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웃 나라들은 예람 왕국의 마법 국력을 늘 경계했고, 그 균열을 찾아내려는 눈길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늘 조용해야 했다.'
실력을 드러내지 않는 것.
존재감을 죽이는 것.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임무였다.
학원에서도, 사교 모임에서도, 나는 그저 청하 공작가의 딸이자 왕태자의 혼약자로만 존재해야 했다.
마차가 공작가 저택 앞에 멈춰서고, 나는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는 발걸음마다 하녀들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그 침묵조차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잉크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있었고, 촛불 하나가 서류 더미 위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오늘은 일찍 왔구나."
"전하께서 오지 않아도 된다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손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나는 그 짧은 정지에서 아버지의 감정을 읽어냈다.
'놀라움, 그리고 계산.'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가 다시 멈추는 그 순간, 나는 이미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느냐."
"학원에 새로 편입한 학생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평민 출신의 광마법사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그 눈빛은 서류를 살필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집중이었다.
"광마법이라. 확실한 정보인가."
"전하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니,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였다.
"광마법사가 흔한 재능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지 않느냐."
"압니다."
"평민 출신 중에서 그 정도 재능이 발견된 예는 지난 백 년간 없었다."
나는 그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은, 이 일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명도 없었던 재능이, 하필 지금 이 시점에 나타났다는 것.
그것은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정교한 타이밍이었다.
"조사해 보겠습니다."
"아니, 조사는 내가 맡을 것이다. 너는 학원에서의 임무에 집중해라."
"임무라 하시면."
아버지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딸을 보는 아버지의 눈이 아니라, 가문의 자산을 점검하는 가주의 눈이었다.
"전하의 혼약자로서 위신을 지키는 것. 그것이 지금 너의 임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짧고 매끄럽게 나왔다.
수백 번 연습한 것처럼, 아니 실제로 수백 번 해왔던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감정이 스며들고 있었다.
'위신이라는 말이 이렇게 얇게 느껴진 적은 없었는데.'
방을 나서며 나는 서재의 문을 조용히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마저 조심스러웠던 것은, 오랜 습관이자 예의였을 것이다.
복도를 지나 정원으로 이어지는 창가에 잠시 멈춰 서서, 나는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장미가 아직 피지 않은 계절이었다.
뼈대만 남은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잎도 꽃도 없이 앙상하게 뻗은 가지들은 마치 계절을 잘못 찾아온 손님처럼 초라해 보였다.
나는 그 앙상한 모습이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혼약이라는 명분만 남고, 그 안의 감정이나 관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름뿐인 관계, 형식뿐인 약속.
그것이 나와 선유헌 사이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 사실이 왜 이렇게 마음을 무겁게 하는지, 나는 스스로도 정확히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감정이 없다고 자부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평민 출신 광마법사라는 단어가, 아까부터 계속 머릿속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하가 직접 그 학생을 만나러 갔다는 사실도,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날카로운 눈빛을 보인 것도, 전부 우연이라 넘기기엔 뭔가가 걸렸다.
'백 년간 없었던 재능이라니.'
나는 그 반문에 스스로 답을 미룬 채, 다음 날 등원 준비를 서둘렀다.
옷장 앞에 서서 교복을 정리하는 손끝이,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단순한 피곤함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일 학원에서 마주칠 그 얼굴이,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
그 예감이 옳다면, 나의 조용한 나날은 이제 끝나가고 있는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