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제 오지 않아도 된다."
선유헌 왕태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왕태자궁 정원의 아침 햇살이 그의 금색 머리카락 위로 부서지고 있었다.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장미 넝쿨 사이로 시종들의 발소리가 조심스럽게 오갔다.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그 말을 다시 곱씹었다.
'지금, 나에게 물러가라 한 것인가.'
청하 공작가의 영애로서 열 살이 되던 해부터 이어져 온 보좌였다.
그해 겨울, 아버지는 나를 왕태자궁 앞에 세워두고 단 한 마디만 남겼다.
"눈에 띄지 말고, 놓치지도 말아라."
그 말이 지금까지 내가 지켜온 유일한 원칙이었다.
칠 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선유헌의 곁에서 그의 습관과 기분, 마력의 흐름까지 손금처럼 읽어왔다.
그 세월이 저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전하, 오늘 오전에 예정된 마력 안정화 훈련이 있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낮게 가라앉혀 사무적으로 답했다.
훈련이라 함은 단순한 수련이 아니라, 그의 미약한 마력이 폭주하지 않도록 매주 세 번씩 반복해온 의식과도 같은 절차였다.
속으로는 이미 다른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저 태도가 갑자기 나온 게 아니다. 며칠째 조짐이 있었다.'
지난주부터 그는 서류를 살피다가도 창밖을 자주 내다보았다.
식사 시간도 평소보다 짧아졌고, 나에게 건네는 말수도 줄어들었다.
그런 작은 변화들을 나는 놓치지 않고 있었다.
선유헌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으며 처음으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훈련이 뭐가 중요한가. 오늘은 다른 일이 있다."
"다른 일이라 하시면."
"학원에 새로 편입한 학생이 있다더군. 그쪽으로 가봐야겠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학생 한 명 때문에 정례 훈련을 미룬다고.'
왕태자가 마력 훈련을 이유 없이 미룬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몸이 좋지 않을 때도, 국사가 바쁠 때도 그는 훈련만큼은 거르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유일한 의무였기 때문이었다.
선유헌은 예람 왕국 역대 왕태자 중 가장 낮은 마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역대 기록을 뒤져보아도 그의 마력량에 근접한 이는 삼백 년 전에나 한 명 있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은 궁 안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면서도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는 금기였다.
시종들조차 그 앞에서 마력이라는 단어를 꺼낼 때는 목소리를 낮추곤 했다.
나는 그 콤플렉스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매번 말을 골라야 했다.
가끔은 그가 스스로 훈련실 문을 두드리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사흘 전부터 은근한 화제를 흘려두기도 했다.
그런 그가 훈련을 스스로 미루겠다고 나선 것이다.
'뭔가 있다.'
지금까지 쌓아온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전하, 그 학생이 누구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선유헌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불쾌해졌다.
지금까지 그가 나에게 저런 표정을 보인 적은 없었다.
칠 년 동안 나는 그의 웃는 얼굴을 손에 꼽을 만큼밖에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학생 한 명의 이름을 꺼내기도 전에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름은 한소이라 하더군. 평민 출신인데 광마법을 각성했다지."
나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 새겨 넣었다.
'평민 출신, 광마법 각성.'
광마법은 대륙에서 가장 희귀한 마법 계통 중 하나였다.
빛의 속성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는 자는 백 년에 한둘 나올까 말까 했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신전에 귀속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귀족 가문이라 해도 몇 세대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었다.
그런데 평민 출신이라 했다.
혈통도, 가문도, 뒷배도 없는 자가 그런 재능을 가지고 나타났다는 것은 궁 안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광마법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청하 공작가의 방식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힘을 보이는 것은 곧 약점을 보이는 것이다.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검을 뽑기 전까지는 아무도 네가 검을 가졌는지 몰라야 한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내 손안의 빛을 단 한 번도 밖으로 꺼내지 않고 살아왔다.
"흥미롭군요."
나는 겉으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전혀 다른 말을 곱씹고 있었다.
'흥미로운 게 아니라 위험하다.'
평민 출신의 광마법사가 학원에 편입했다는 것은 단순한 화제거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궁 안 세력 균형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씨앗이었다.
지금까지 왕태자의 주변에는 오로지 귀족가의 자제들만이 허락되어 있었다.
그 균형이 무너진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계산이 다시 짜여야 할 것이었다.
선유헌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종에게 마차를 준비하라 명했다.
그 몸짓에는 평소 볼 수 없던 활기가 배어 있었다.
시종장이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슬쩍 돌아보았지만, 나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전하가 저렇게 서두르는 걸 본 적이 있던가.'
없었다.
적어도 나와 함께한 시간 동안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저런 걸음걸이로 걷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발끝에 힘이 실려 있었고, 어깨는 곧게 펴져 있었다.
평소 그가 걸을 때는 늘 반쯤 굽어 있던 등이었다.
"이 영애는 오지 않아도 좋다고 하지 않았나."
선유헌이 마차에 오르기 직전,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말투에는 배려도 예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귀찮은 존재를 떨쳐내는 듣기 좋은 표현이었을 뿐이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단순한 무시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냉대는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훈련 시간에 늦어도, 내가 올린 서류를 며칠씩 방치해도, 그것은 그가 나라는 존재 자체에 무게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태도는 명백한 선택이었다.
나를 배제하겠다는 선택.
무관심과 배제는 근본부터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전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따르겠습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마차가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정원에 홀로 남았다.
바람이 차가웠다.
손끝이 시렸다.
시종들도 하나둘 자리를 떠나고, 정원에는 나와 장미 넝쿨만 남아 있었다.
멀리서 마차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한소이.'
나는 그 이름을 다시 한번 소리 없이 되뇌었다.
평민, 광마법, 학원 편입.
세 가지 조각을 나란히 놓고 보니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평민 출신이 어떻게 학원에 편입할 자격을 얻었는지, 그 뒤에 누군가의 후원이 있었는지, 그것부터 확인해야 했다.
왕태자의 콤플렉스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그의 마음을 저렇게 흔들어놓을 수 있는 존재라면, 결코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선유헌 앞에서 마력이라는 단어를 편하게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 학생은, 어쩌면 그 금기를 아무렇지 않게 넘어설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그 존재가 내 자리를 정확히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정원을 나서기 전, 나는 시종장을 불러 낮게 물었다.
"그 편입생에 대해 알아볼 수 있겠나."
시종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