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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제1왕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를 가로지르는 순간, 방금까지 채영에게 쏠려 있던 시선들이 일제히 방향을 바꾸었다. 마치 조류가 갑작스레 물길을 튼 것처럼, 모든 관심과 호기심이 순식간에 다른 쪽으로 휩쓸려 갔는데, 그 낙차가 채영의 가슴에 서늘한 균열을 남겼다. 방금까지 그녀를 향해 있던 부채 뒤의 수군거림도, 은근한 곁눈질도, 한순간에 방향을 잃고 흩어졌다. 채영은 그 공기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며 저도 모르게 옷깃을 매만졌다. 손끝이 차가웠다. 애써 쌓아온 것이 이렇게 허무하게 뒤로 밀려나는구나. 오늘 하루, 이 연회장 안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화제와 균형이 한순간에 뒤집힐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 연회장 중앙의 대리석 계단 위, 화려한 정복을 갖춰 입은 정하준이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짙은 청색 눈동자와 단정하게 정돈된 흑발이 촛불 아래 은은하게 빛났는데, 그 걸음걸이 하나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했다. 그는 마치 물속을 미끄러지는 뱀처럼, 서두르는 기색 없이도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기며 계단을 밟아 내려왔다. 악단의 선율이 문득 낮아졌다. 오케스트라의 현악기가 잦아들며 관악기의 여운만이 은은하게 남았고, 그 사이로 사람들의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졌다. 귀족 영애들의 부채질이 일순 멈추었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마치 누구도 먼저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암묵의 규칙이 순식간에 세워진 것 같았다. 채영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게임 '골든로즈 아카데미'의 진짜 공략 대상, 여주인공 하은과 얽힌 서사의 중심축이 되는 인물. 오프닝 이벤트에서 헤어핀을 건네주며 시작되었어야 할 그 플래그를, 채영이 직접 손을 써 미리 끊어낸 상대였다. 그날 광장에서 하은의 손목을 붙잡고 다른 길로 이끌었던 순간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채영의 계획표 안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르게, 왕실의 정식 무도회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정하준의 시선이 연회장을 훑다가 문득 한곳에 멈추었다. 그 시선의 끝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은이었다. 채영은 그 시선의 방향을 감지하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예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듯한 감각이었다. "저 아이가……" 정하준이 낮게 중얼거리며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는 또렷하게 들릴 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벼려온 문장을 이제야 꺼내놓는 사람처럼, 그의 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채영의 손안에서 하은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하은 역시 그날 광장에서의 짧은 만남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손끝의 떨림이 손바닥을 타고 채영의 손목까지 전해졌는데, 그 온도가 이상하게도 뜨겁게 느껴졌다. 방금까지 채영을 향해 쏠려 있던 적의와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이제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부채 뒤에서 낮게 속삭였고, 누군가는 눈을 크게 뜨며 옆 사람과 눈짓을 교환했다. 채영이 애써 쌓아 올린 도전적인 주목이, 왕자 하나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애써 무너뜨리지 않은 것을, 저 사람이 스스로 다시 세우고 있었다. "채영 님." 하은이 낮게 속삭였다. 목소리에는 옅은 불안이 섞여 있었다. "저분이 왜 저를……" 채영은 대답할 말을 고르지 못한 채, 정하준이 자신들을 향해 곧장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불길한 확신처럼 느껴졌다. 마치 처음부터 이 길의 끝이 하은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의 발걸음은 곧게, 그리고 지체 없이 이어졌다. 그 사이 주변의 공기는 점점 더 팽팽해지고 있었다. 연회장의 불빛이 그의 등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만들어냈고, 그 그림자가 대리석 바닥을 미끄러지듯 가로지르며 채영과 하은이 서 있는 곳까지 뻗어왔다. 채영은 그 그림자의 끝이 자신의 발끝에 닿는 순간, 숨을 짧게 삼켰다. 하린이 채영의 등 뒤에서 조용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가씨, 이건 예정에 없던 흐름입니다." 그 말에 채영의 턱 끝이 단단하게 조여지는 것을, 하린은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오랫동안 세워온 전략의 흐름이, 지금 이 한순간에 자신의 손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채영은 애써 표정을 다잡았으나, 하린의 눈에는 그 미세한 균열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알고 있어." 채영이 짧게 답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긴장은 숨길 수 없었다. 정하준의 걸음이 두 사람 앞에서 멈추었을 때, 연회장 전체가 마치 숨을 죽인 듯 조용해졌다. 그 정적을 채운 것은 오직 멀리서 흘러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잔향뿐이었다. 촛불이 타오르는 작은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그런 침묵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정하준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서늘했다. 잘 정돈된 흑발 아래로 드러난 이마와, 그 아래 짙게 자리한 청색 눈동자가 촛불의 황금빛을 받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완벽하게 다듬어진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서, 오직 시선만으로 그 자리의 온도를 바꾸어놓고 있었다. 정하준의 시선이 채영을 향해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하은에게로 완전히 옮겨 갔다. 그 짧은 순간, 채영은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그 시선에서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통로처럼, 자신은 그의 목적지가 아니라는 사실만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 짙은 청색 눈동자에는 채영이 예상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서늘한 확신. "오랜만이군." 정하준이 하은을 향해 낮게 말을 건넸다. "그날 이후로 계속 찾고 있었는데."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채영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듯했다. 자신이 그토록 조심스럽게 끊어냈던 플래그가, 이렇게 다시 이어지려 하고 있었다. 헤어핀을 건네는 그 짧은 순간을, 자신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해서 막아냈던가. 그런데도 저 남자는 이미 다른 방식으로, 다른 순간에, 그 서사를 다시 이어 붙이고 있었다. 찾고 있었다니.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어긋난 거지. 채영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물음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은의 손끝이 여전히 자신의 손안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 떨림이 채영을 다시 현실로 붙잡아 세웠다.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다시 세 사람에게로 집중되었고, 그 시선들 속에서 채영은 처음으로 자신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흐름 속에 던져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계산과 준비가, 이 한마디 앞에서 무력해지고 있었다. 연회장의 촛불이 순간 흔들리며, 채영의 은빛 머리카락 위로 붉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는 마치 무언가의 예고처럼, 짧게 일었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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