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노말엔딩, 내가 만든다

4화

무도회가 열리기 전날 밤, 저택의 별관 응접실은 은은한 등불 아래 향유와 분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창밖으로는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스치듯 지나가고 있었으나, 방 안의 온기는 오히려 그 서늘함을 밀어내며 나른한 정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린은 채영의 등 뒤에 서서 은빛 머리카락을 한 올씩 정성스레 빗어 내리며, 그 손끝에 실린 힘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빗살이 지나갈 때마다 채영의 머리카락은 마치 은실을 풀어놓은 듯 매끄럽게 흘러내렸고, 그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는 등불 빛을 받아 옅은 아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린의 손은 오랜 세월 이 일을 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익숙함으로 움직였으나, 그 눈빛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이미 사교계에는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가 쫙 퍼졌다고 합니다." 하린이 무심한 어조로 말을 던졌다. "왕자 전하의 만남을 방해한 영애, 라고들 하더군요." "그리고?" 채영이 짧게 되물었다. 거울 속 그녀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도의 이야기라면 아가씨께서 이미 짐작하고 계셨겠지요." 하린이 빗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웃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건, 그 소문이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까지 퍼질 정도라면, 이는 누군가 손을 쓴 것이 아닌가 싶어서요." 채영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조소도 아니고 불안도 아닌, 이상하게 평온한 결기가 섞여 있었다. "손을 썼든 안 썼든 상관없어." 채영이 나직이 말했다. "어차피 게임 시나리오대로라면 나는 늦든 이르든 악역으로 낙인찍힐 운명이었어.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이용해야지." 하린은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오랜 시간 채영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확신 하나는 갖고 있었다. 이 주인은 결코 순순히 무너질 사람이 아니라는 것. 하린은 빗을 다시 집어 들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일 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옆을 지키겠습니다." 그 말에는 하녀의 도리를 넘어선, 오래된 충심이 담겨 있었다. 채영은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다음 날 저녁, 왕궁의 대연회장은 수백 개의 촛불로 채워진 황금빛 공간이 되어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대리석 바닥 위를 흘러넘쳤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서로의 안부와 소문을 주고받았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수백 개의 유리 조각을 통해 빛을 흩뿌리고 있었으며, 그 빛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얼굴 위에서 일렁였다. 채영이 연회장 입구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곳을 채우고 있던 웅성거림이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시선들이 물결처럼 그녀에게로 쏠렸는데, 그 시선 속에는 호기심과 경계, 그리고 은근한 적의가 뒤섞여 있었다. "저 아이가 그 영애로군요." 누군가가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자 전하의 앞길을 막았다던." "저런 얼굴로 그런 일을 벌였다니, 믿기지가 않는군요." 다른 누군가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맞받았다. 그 목소리에는 겉으로는 존대를 갖췄으나 속으로는 명백한 비웃음이 배어 있었다. 채영은 그 시선들을 정면으로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긴장이 흘렀으나, 그녀는 턱을 살짝 치켜들며 오히려 더욱 당당한 걸음걸이를 취했다. 그 모습은 마치 사냥터에 뛰어든 어린 짐승이 오히려 사냥꾼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과 같았다. 걸음마다 치맛자락이 대리석 위를 스치며 뱀이 미끄러지듯 소리 없는 자취를 남겼다. *겁먹은 척은 하지 않을 거야.* 채영은 속으로 되뇌었다. *지금 여기서 흔들리면, 그다음은 없어.* 연회장 한쪽 구석, 시녀들의 무리에서 벗어나 홀로 서성이는 소녀가 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을 어깨 아래로 늘어뜨리고, 투명한 청색 눈동자로 낯선 화려함을 두려운 듯 바라보고 있는 그 소녀가 바로 이하은이었다. 익숙지 않은 예복의 옷깃이 목을 죄는지, 하은은 자꾸만 손끝으로 그 부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은은 익숙지 않은 예복 차림으로 어색하게 서 있다가, 채영을 발견하자 얼굴에 순식간에 안도의 빛이 번졌다. 마치 낯선 바다에서 익숙한 뱃머리를 발견한 사람의 얼굴 같았다. "채영 님." 하은이 작은 목소리로 부르며 다가왔다. "저는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긴장할 것 없어." 채영이 부드럽게, 그러나 흔들림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하지만… 다들 채영 님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데, 제가 곁에 있으면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하은이 눈을 내리깔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자신을 낮추는 습관이 배어 있었다. "방해라니." 채영이 짧게 잘라 말했다. "네가 내 옆에 있는 게 방해가 될 이유는 없어." 그 말에 하은의 두 눈이 순간 반짝였는데, 그 반짝임은 단순한 안도라기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했다. 채영은 그 눈빛을 마주 보며,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이 아이의 신뢰를 얻어야 해. 그래야만 노말 엔딩으로 갈 수 있어.* 그러나 그 계산적인 문장 뒤로, 하은의 손이 자신의 소매 끝을 살짝 붙잡아왔을 때 느껴지는 온기가, 이상하게도 채영의 가슴 한구석을 데우고 있었다. 그 온기는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으나, 채영은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를 애써 미루었다.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리는 것을 느낀 채영은, 오히려 그 시선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하은의 손을 살짝 잡아 이끌며 연회장 중앙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평민 소녀를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뭘까요." 누군가의 속삭임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게다가 저 손을 잡은 모습이라니." "게다가 저런 미천한 것을 마치 귀한 손님처럼 대하다니, 역시 그 영애답군요." 다른 목소리가 낮게 이어붙였다. 그 속삭임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으나, 채영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비웃음을 정면으로 받아치듯,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속삭인 자를 향해 서늘한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을 마주한 귀족 부인은 순간 낯빛이 하얗게 질리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부채를 쥔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채영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연회장의 중심으로 다가서는 그 걸음걸이는, 마치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적의를 딛고 넘어서려는 도전과도 같았다. 채영의 심장은 요란하게 뛰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조금의 흔들림도 내비치지 않았다. 하은은 그런 채영의 옆에서, 자신의 손을 잡은 손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오히려 스스로가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채영 님은… 무섭지 않으세요?" 하은이 문득 작게 물었다. "무섭지." 채영이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답했다. "하지만 무서워하는 걸 저들에게 보여줄 이유는 없잖아." 그 대답에 하은은 잠시 말을 잃은 채, 자신의 손을 잡은 채영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연회장 반대편에서 낮게 웅성거림이 다시 일었다. 이번의 웅성거림은 조금 전과는 결이 달랐다. 놀라움과 경탄이 섞인, 마치 무언가 대단한 존재가 등장했음을 알리는 전조 같은 소리였다. 부채 뒤로 감춰진 눈들이 일제히 그 방향으로 돌아갔고, 오케스트라의 선율마저 잠시 흐트러지는 듯했다. 채영은 그 웅성거림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하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으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새겼다. *오늘은 내가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 밤이야.* 그러나 그 다짐이 무색하게, 연회장 입구 쪽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크고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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