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누구야."
도현이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소녀는 대답 대신 도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살갗에 닿는 순간 소름이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설명은 나중에. 지금은 뛰어야 해요."
말끝이 살짝 떨렸다.
소녀는 그대로 옥상 끝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도현은 얼떨결에 끌려가듯 함께 뛰었다.
발밑에서 옥상 바닥이 사라지는 감각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허공에 발이 닿는 순간,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
'떨어진다.'
바람이 귓가를 찢을 듯 스쳤다.
시야 가득 아래 골목의 가로등 불빛이 확대되며 다가왔다.
그러나 낙하는 이내 완만해졌다.
소녀의 등 뒤에서 검은 나비 같은 것들이 무수히 피어올라 날개처럼 퍼졌다.
퍼드득.
수백 장의 날개가 접히고 펼쳐지는 소리가 겹겹이 울렸다.
두 사람은 그 위에 얹힌 채 천천히 옆 건물 옥상으로 미끄러져 내려앉았다.
쿵.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부딪혔다.
콘크리트 바닥의 냉기가 무릎뼈를 타고 곧장 올라왔다.
도현은 숨을 몰아쉬며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숨 한 번을 들이쉬는 데도 갈비뼈가 뻐근하게 눌렸다.
"너, 정체가 뭐야."
소녀는 앞머리 사이로 도현을 살짝 바라보다 시선을 피했다.
"흑란이에요."
짧은 대답이었다.
이름을 말하는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흑란?"
"정안회… 소속이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도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속이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
흑란은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골랐다.
손톱 끝이 하얗게 눌려 있었다.
"…설명하자면 길어요. 지금은 시간이 없고."
건물 사이로 다시 거대한 날갯짓 소리가 울렸다.
퍼덕, 퍼덕.
소리가 한 번 울릴 때마다 옥상 바닥의 물웅덩이가 파문을 일으켰다.
용마가 이쪽을 향해 방향을 틀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건물 옥상들을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저거, 나 찾는 거야."
도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물기가 없었다.
흑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몸에… 그 용마의 뇌가 들어 있으니까요. 서로를 느껴요."
도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더 빠졌다.
손목이 저절로 옷소매 안으로 파고들었다.
'죽어서까지 그놈한테 묶여 있는 거야.'
목구멍 안쪽이 타는 듯 뜨거워졌다.
〈고객님, 대상 개체와의 동조율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동조율 상승 시 마력 통제력이 저하될 수 있습니다.〉
도현은 알림창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턱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잖아.'
도현은 알림창을 손등으로 밀어내듯 시선을 돌렸다.
"넌 왜 날 도와주는 거야."
흑란의 손끝이 움찔했다.
시선이 바닥 어딘가로 미끄러졌다.
"…도, 도움이 필요해서요. 저도."
"뭐?"
"당신, 마력이 아직 많이 남아 있잖아요. 정안회에서 뽑아 쓰기 전에… 저랑 같이 도망치면, 서로한테 좋아요."
도현은 흑란의 말투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말은 이용하겠다는 건데, 목소리는 자꾸 흔들렸다.
문장 끝마다 숨을 삼키는 버릇이 있었다.
'믿을 수 있는 건가.'
'아니, 지금은 선택권이 없다.'
도현은 지팡이를 고쳐 쥐며 말했다.
손바닥에 밴 땀이 지팡이 표면에 미끄러졌다.
"조건이 뭐야."
흑란이 처음으로 똑바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앞머리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살짝 드러났다.
눈동자 안쪽에서 옅은 붉은 실핏줄이 비쳤다.
과로했거나, 오래 울었거나.
"당신 마력을… 저랑 나눠서 순환시켜야 해요. 그래야 저도 더 강해지고, 당신도 폭주하지 않아요."
"내 마력을 왜 너한테 줘."
"안 그러면 당신, 이틀도 못 버텨요."
흑란의 목소리가 이번엔 흔들리지 않았다.
문장이 못처럼 박혔다.
도현은 잠시 침묵했다.
손목의 검은 문양이 다시 느리게 박동했다.
두근, 두근.
문양이 뛸 때마다 팔뚝 전체가 뜨겁게 저려왔다.
〈고객님, 파트너 등록을 진행하시겠습니까?〉
〈등록 시 마력 순환 효율이 상승합니다. (비용: 신뢰도 조건 필요)〉
도현은 그 문구를 노려보았다.
글자 하나하나가 값을 매기듯 차갑게 박혀 있었다.
'믿음이 없어도 거래는 되는 건가.'
〈이건 뭐, 사람 목숨도 프로모션으로 파네.〉
속으로 뇌까린 말이 씁쓸하게 목구멍을 긁었다.
건물 아래에서 요원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쪽이다! 옥상으로 올라갔어!"
발소리가 계단을 타고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퍽, 퍽, 퍽.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계단을 두드리는 소리가 옥상 바닥을 타고 진동으로 전해졌다.
흑란이 도현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이번에는 손끝이 아니라 손바닥 전체로 감싸듯 쥐었다.
"결정은 나중에 해요.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
도현은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낮게 물었다.
"배신하면 죽여버릴 거야."
흑란의 입꼬리가 살짝 떨리며 올라갔다.
웃는 건지, 겁먹은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말투는 가벼웠지만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건물 사이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발끝이 옥상 난간을 스치듯 넘었다.
뒤에서 용마의 포효가 밤공기를 갈랐다.
크아아아아.
건물 유리창이 일제히 떨렸다.
몇 개는 견디지 못하고 쩡,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먼지와 유리 파편이 아래로 쏟아지는 소리가 뒤늦게 따라왔다.
도현은 뛰면서도 계속 손목의 검은 문양을 내려다보았다.
문양 주변 피부가 검붉게 부어 있었다.
'71시간에서 이제 얼마나 남았지.'
〈남은 시간: 68시간 22분 15초〉
숫자가 눈앞에서 초 단위로 줄어드는 것을 도현은 이를 악물고 지켜보았다.
'벌써 이만큼이나.'
계단 하나를 건너뛸 때마다 다리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듯 당겼다.
숫자를 확인한 순간, 골목 저편에서 낯선 실루엣 하나가 스르르 나타났다.
발소리가 없었다.
바람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조차 없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일곱 개의 별 문양이 새겨진 흰 로브를 걸친 존재였다.
로브 자락이 바닥에 닿지 않고 살짝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흑란의 걸음이 처음으로 뚜렷하게 멈춰 섰다.
발바닥이 그대로 바닥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도현의 귀에도 들렸다.
"…칠성수호대."
흑란이 낮게 중얼거린 그 이름이, 도현의 마음속에 낯설고 서늘한 파문을 남겼다.
로브 속 실루엣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여전히 그늘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다만 흰 로브 위로 별 문양 일곱 개가 하나씩, 순서대로 옅은 빛을 뿜기 시작했다.
도현의 손목에서 문양이 다시 한 번 세게 박동했다.
두근.
이번엔 통증이 팔꿈치까지 뻗쳤다.
〈고객님, 경고 대상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전투를 원하지 않으시면 즉시 회피 경로를 선택하십시오.〉
알림창이 뜨자마자 흑란이 도현의 손을 힘껏 당겼다.
"뛰어."
한마디였다.
도현은 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반대 방향 골목으로 몸을 틀었다.
등 뒤에서 흰 로브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따라붙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