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마왕과의 최종 전투는 상상을 초월했다.
성벽이 무너지고,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계속됐다.
땅이 울부짖었다. 마치 지구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이도현과 서아, 그리고 함께 싸워온 동료들 모두가 목숨을 걸었다.
누구 하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다들 이미 죽음 따위는 초월한 표정들이었다.
콰직!
마왕의 마지막 일격이 대지를 갈랐다.
그 충격파에 나는 십 미터쯤 밀려났다. 갑옷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그 순간, 10년간 쌓아온 모든 힘을 검에 담아 내질렀다.
이건 정말이지, 모세가 홍해를 가르던 순간이랑 다를 게 없었다.
과장 좀 섞어서 말하자면,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을 펼치던 그 심정이랄까.
빛이 폭발했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했다. 조용함이 이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마왕은 쓰러졌다.
"끝났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다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10년이라는 시간이 그제야 무게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나도 검을 놓고 무릎을 꿇었다. 손이 떨렸다.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떨어본 적 없던 손이었다.
신이 다시 나타났다.
얼굴 없는 빛의 형체. 여전히 표정이라는 걸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임무 완수를 확인한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빛이 나를 감쌌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었다. 아니, 붕 뜨는 게 아니라 몸이 통째로 지워지는 것 같은 느낌.
"잠깐만요, 다른 사람들은..."
이도현과 서아, 함께 싸운 모든 사람들을 돌아봤다.
이도현은 여전히 검을 짚고 서 있었다. 서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의 계약에 따라 처리된다."
신의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저 인간, 아니 저 존재는 항상 저렇게 무성의했다.
십 년 동안 목숨 걸고 싸운 사람한테 저 한마디로 끝이라니.
"강민준씨!"
서아가 소리쳤다.
"우리 세계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빛이 이미 나를 완전히 삼켜버렸다.
"서아씨! 이도현씨!"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은 벌어졌는데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그 하얀 빛.
눈을 떴을 때, 나는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형광등 불빛.
소독약 냄새.
익숙한 현대의 풍경.
돌아왔다.
정말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손을 들어 눈앞에 갖다 댔다. 손등에 마왕과 싸우다 생긴 흉터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흉터가 다 사라져 있었다.
"환자분! 정신 드세요?"
간호사복을 입은 여성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명찰에는 '박지현'이라고 쓰여 있었다.
목소리가 걱정 반, 신기함 반이 섞인 톤이었다.
"여기가... 어디죠?"
"○○병원이에요. 심장마비로 쓰러지셨다가 극적으로 회복하셨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심장마비.
그러고 보니 나는 회사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는데, 이 사람 눈에는 그냥 "극적인 회복" 정도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지금이... 며칠이나 지난 건가요?"
"이틀 지났어요. 야근하시다가 발견되셨다는데, 정말 운이 좋으셨어요."
이틀.
이세계에서는 10년이 흘렀는데, 여기서는 겨우 이틀.
이도현이 말했던 시간의 비율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직접 겪어보니 소름이 돋았다.
십 년의 전쟁이 현실에서는 이틀짜리 병가로 압축되다니. 이게 무슨 시드머니(seed money) 굴리듯 시간이 배로 불어나는 것도 아니고.
"몸에 이상한 곳은 없으세요? 검사 결과는 다 정상인데, 좀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요."
"이상한 부분이요?"
"근육량이랑 골밀도가... 뭐랄까, 운동선수 수준으로 나왔어요. 원래 그러셨어요?"
박지현이라는 간호사가 갸우뚱했다. 차트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는 손짓이 꽤나 진지했다.
"아, 예전부터 운동을 좀 했어서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10년간 마왕과 싸운 몸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설명한다 한들 저 간호사는 정신과 상담을 권할 게 뻔했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회복이 빠르시겠어요."
박지현은 밝게 웃으며 서류를 정리했다.
"보호자분은 안 계세요? 연락드릴 분이라도..."
"부모님은... 이미 안 계시고, 형제도 없어요. 혼자 살아요."
혼자라는 말에 박지현의 표정이 살짝 안타까워졌다.
동정하는 눈빛. 익숙했다. 이세계에서도, 현실에서도 나는 항상 혼자였으니까.
"그래도 회사에서 걱정하실 텐데, 연락 한번 해보시겠어요?"
회사.
그 단어를 듣자 갑자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10년간 마왕과 싸우고 왔는데, 이제 또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톰슨가젤이 사자 무리에서 살아남으면 뭐 하나, 다시 하이에나 무리로 걸어 들어가는 격이었다.
"네, 연락해봐야겠네요."
며칠 후, 퇴원한 나는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사무실 문을 열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형광등, 책상, 서류 더미.
냄새마저 그대로였다. 커피 자국 밴 카펫 냄새, 복사기 토너 냄새.
십 년 전쟁을 겪고 돌아온 자리가 이 냄새라는 게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어, 강민준씨. 살아있었네?"
김태욱 팀장의 목소리였다.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말투, 표정, 심지어 넥타이 매는 방식까지.
"네, 죄송합니다. 갑자기 쓰러져서..."
"죄송은 무슨. 자기 몸 관리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어요."
관리를 못한 게 아니라 마왕이랑 싸우다 왔다고 말하면 믿어줄까.
당연히 안 믿을 것이다. 오히려 저 사람 표정으로 보건대 정신병원 추천서를 써줄 기세였다.
"그동안 자기가 하던 일 다 밀렸어. 오늘 안에 다 처리해요."
"이틀 밖에 안 됐는데..."
"이틀이든 사흘이든 밀린 건 밀린 거지. 빨리 처리해요."
똑같다.
이 사람은 정말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니, 이쪽 세계에서는 이틀밖에 안 지났으니 당연한 건가.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나는 자리에 앉아 밀린 서류들을 확인했다.
작은 오타 하나까지 지적당했던 그 서류들.
예전 같으면 손이 떨렸을 텐데, 지금은 이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왕과 싸우던 손으로 이런 서류를 만지고 있다니.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뭐 웃겨요?"
김태욱이 눈을 흘겼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뭔가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10년간 마왕과 싸우며 얻은 힘.
초월적인 신체 능력.
제작 능력.
이런 걸 가지고도 나는 여전히 이 사무실에서 김태욱에게 무시당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을 구한 용사가 팀장한테 오타 하나로 갈굼당하는 이 상황이, 정상인가?
그날 저녁, 퇴근길에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서울의 밤하늘은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세계에서는 매일 밤 이상한 색깔의 별들이 떠 있었는데.
붉은 별, 초록 별, 심지어 보라색으로 빛나는 별자리까지.
그에 비하면 이 하늘은 그냥 검은 도화지에 가까웠다.
그 순간, 손끝에서 미약한 빛이 반짝였다.
마력의 흔적이었다.
심장이 갑자기 벌렁거렸다.
아직 힘이 남아있다.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계속 이 사무실에서 무시당하며 살아야 할까.
서아와 이도현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같은 세계로 돌아왔을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갔을까.
서아가 마지막으로 외쳤던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럴까? 그래도 될까? 어느 쪽이든?
생각은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를 돌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예전의 나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다음 날, 회사에서 벌어진 사건이 그 사실을 완전히 증명해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