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광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머리가 띵했다.
발밑은 대리석처럼 매끈한 돌바닥이었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지구의 어떤 광장에서도 본 적 없는 문양들이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주변에는 나 말고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
누군가는 방금까지 술을 마시던 차림 그대로였고, 누군가는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나는? 나는 회사 유니폼 셔츠 차림이었다. 넥타이는 반쯤 풀려 있었다.
한국말도 있었고, 영어도 들렸고, 알 수 없는 언어도 섞여 있었다.
여긴 어디야?
다들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는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나는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게 꿈인가? 아니면 술에 뭘 탄 건가? 회사에서 도망친 것도 서러운데, 이건 또 뭐란 말인가.
그때 하늘에서 파란 창 같은 것이 나타났다.
마치 게임 화면처럼.
[시스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은 이 세계에 소환된 각성자입니다.]
[마왕 토벌 임무가 부여되었습니다.]
뭐야, 이거 진짜 게임이잖아.
주변 사람들도 다들 눈앞에 같은 창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놀란 표정, 흥분한 표정, 두려운 표정이 뒤섞였다.
누군가는 손을 뻗어 창을 만져보려 했다. 물론 만져질 리 없었다. 그냥 허공에 손짓만 몇 번 하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상태창]
이름: 강민준
레벨: 1
랭크: F
체력: 10
마력: 5
F랭크.
레벨 1.
체력 10.
뭔가 처참한 숫자들이었다.
회사에서도 나는 항상 밑바닥이었다. 승진 명단에서도 제외, 인센티브 명단에서도 제외. 그런데 여기서도 F냐? 이세계까지 와서 등급 매겨지는 인생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어이, F랭크가 여기 있네."
뒤에서 누군가 나를 보며 비웃었다.
덩치가 큰 남자였다.
갑옷 비슷한 걸 입고 있었는데, 나랑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근육질 팔뚝에는 이미 상처 자국 같은 것도 있었다. 저 사람도 소환됐다는 건데, 벌써 저런 몸을 갖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실례지만..."
"실례는 됐고, 넌 짐이야. 알아? 짐."
짐이라니.
처음 본 사람에게 대뜸 짐짝 취급을 받았다.
살아오면서 온갖 무시는 다 당해봤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새로운 종류의 모욕이었다. 짐. 화물. 방해물. 나를 그렇게 규정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십 초도 되지 않았다.
"저기요, 그런 말은 좀..."
"그런 말이 아니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데? F랭크가 여기 있으면 우리 팀 전체 평가가 깎여."
평가?
여기서도 평가라는 게 있나.
회사에서 도망쳤는데 여기서도 평가를 당하는구나.
피꺼솟.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정말로 F랭크였고, 정말로 아무것도 할 줄 몰랐으니까.
그때 앞쪽에서 갑옷을 입은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주목! 지금부터 규칙을 설명한다!"
그는 관리자처럼 보였다.
손에는 두꺼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지팡이 끝에서 파란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그 빛이 마치 우리를 감시하는 눈처럼 느껴졌다.
"이 세계는 마왕을 격퇴하기 위한 각성자들의 전장이다. 랭크는 F부터 S까지 나뉜다. 랭크가 낮을수록 위험한 임무에 배정된다."
랭크가 낮을수록 위험한 임무.
나는 F랭크다.
결국 제일 위험한 곳에 던져진다는 뜻이었다.
모세의 기적처럼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 사이에서도 랭크에 따라 자연스럽게 무리가 나뉘었다. 갑옷을 걸친 사람들, 이미 손에서 마력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앞쪽으로. 나 같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뒤쪽으로.
"불만 있는 사람은 지금 말해라. 어차피 소용없지만."
관리자는 씩 웃었다.
조롱하는 웃음이었다.
저 웃음, 어디서 많이 본 표정이었다. 회사 부장님이 야근을 강요할 때 짓던 표정과 똑같았다. 결국 이세계도 사람 취급 안 하는 건 지구와 다를 게 없구나.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럴까? 이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다른 방법이 있을까?
어느 쪽이든, 지금 여기서 도망칠 곳은 없다.
도망친다는 선택지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다. 여긴 회사 화장실이 아니었다. 문을 잠그고 숨을 곳도, 사표를 던지고 나갈 문도 없었다.
"F랭크는 이쪽으로."
낮은 랭크의 사람들이 한쪽으로 몰렸다.
나도 그 무리에 섞였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이었다.
무리 안에는 나이가 어린 사람들도 많았다.
십대로 보이는 소년, 소녀들.
다들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누군가는 손을 떨고 있었고, 누군가는 계속 눈물을 훔쳤다.
"저기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한 소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교복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정말 고등학교 교복이었다.
"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모른다.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녀에게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모른다고 하면, 이 애는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았다.
"괜찮을 거예요. 같이 방법을 찾아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
자신 없는 위로가 이렇게 쓸 데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 덩치 큰 남자가 다시 다가왔다.
아까 나를 짐이라고 불렀던 그 남자.
"F랭크들끼리 뭉치기라도 하려는 거야? 웃기네."
"저희끼리라도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도와? 여기서 도움이라는 게 있을 것 같아? 마족들이 매일 우리를 죽이러 오는데."
마족.
마왕의 부하들이라는 걸까.
그 단어 하나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게임에서나 보던 단어가 실제로 나를 죽이러 온다니.
"당장 내일부터 첫 던전 배정이야. F랭크는 최전선. 살아남으면 랭크 올라가고, 죽으면 그냥 죽는 거지."
죽으면 그냥 죽는 거다.
이 남자는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마치 오늘 저녁 메뉴를 말하듯이.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이렇게 사람 목숨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건가요."
"여기선 그게 규칙이야. 적응 못하면 죽어."
적응 못하면 죽는다.
적응하면 산다.
간단한 논리였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회사에서 적응하지 못해 도망친 나였다. 이번에는 도망칠 곳조차 없는데, 나는 또 적응하지 못할까?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날 밤, 배정받은 막사에서 나는 잠들지 못했다.
주변에는 F랭크 신참들이 다들 웅크리고 있었다. 담요라고 부를 것도 없는 얇은 천 한 장씩만 지급받았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뼈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아까 그 소녀도 근처에 있었다.
이름은 서아라고 했다.
"강민준씨는 원래 뭐 하시던 분이세요?"
"회사원이었어요."
"저는 고등학생이었어요..."
고등학생이 이런 곳에 끌려왔다니.
분노 비슷한 감정이 올라왔다.
서아는 아직 수능도 안 봤을 나이였다. 대학도, 첫사랑도, 아무것도 겪어보지 못한 나이에 마족과 싸워야 한다니. 세상에 이런 부조리가 있을 수 있나.
"내일부터 진짜 전투를 한다는 거죠..."
"네. 무섭죠."
"저도 무서워요."
무섭다는 말을 서로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위로가 됐다.
말이라는 게 별거 아닌데도, 이럴 때는 큰 힘이 됐다. 혼자 두려워하는 것보다 나눠서 두려워하는 게 조금은 덜 무서웠다.
적어도 혼자는 아니었다.
주변에서 다른 신참들도 각자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는 가족 이야기를, 누군가는 원래 살던 세상에 대한 그리움을 늘어놓았다. 다들 알고 있었다. 내일이면 그 이야기의 절반은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걸.
나는 서아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작고 차가운 손이었다.
"살아남아야 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말에 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렇게 밤은 깊어갔다.
아무도 제대로 잠들지 못한 채로.
하지만 다음날 배정받은 던전 입구에서, 우리는 F랭크 신참들끼리만 던전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솔자도 없이.
지원도 없이.
그야말로 사지로 밀어넣는 것이었다.
던전 입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벌써부터 목덜미를 스쳤다. 누군가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저 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 어두운 입구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