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 날, 나는 고용센터에 가야 했다. 실업급여 신청 재확인 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천장을 보면서 오늘 낼 서류들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복기했다. 근로 활동 확인서, 신분증, 통장 사본. 빠진 게 없나 세 번을 세었다.
서류를 잘못 내면 다음 지급이 늦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난달에 그렇게 당했다. 서류 한 장이 늦게 접수됐다는 이유로 이 주를 통장 잔고 십만 원대로 버텼다. 그때 먹은 라면 봉지 숫자를 세어보면 아직도 손이 떨린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겉옷 안주머니를 슬쩍 만졌다. 책은 오늘도 거기 얌전히 들어 있었다. 무게가 있는 것도 아닌데, 손끝에 닿으면 이상하게 존재감이 느껴졌다.
고용센터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번호표를 뽑고 앉아서 삼십 분을 기다렸다. 앞에 앉은 아저씨는 계속 다리를 떨었고, 옆에 앉은 여자는 휴대폰으로 이력서를 고치고 있었다. 다들 여기 앉아 있는 이유가 나랑 크게 다르지 않겠지.
내 번호가 불렸다.
"이도현씨, 근로 활동 확인서 안 내셨네요."
담당자가 서류를 뒤적이며 말했다. 삼십 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다. 표정에 짜증은 없었지만, 하루에도 수십 명을 상대하는 사람 특유의 건조함이 있었다.
"어제 냈는데요."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진짜였다. 어제 퇴근하고 굳이 저녁도 안 먹고 여기까지 와서 접수를 하고 갔다.
"저희 쪽에는 안 들어와 있어서요."
식은땀이 났다. 이번에도 밀리면 이번 달 생활비가 완전히 막힌다. 월세는 밀릴 수 없는 항목이었고, 편의점 알바 급여만으로는 답이 안 나오는 달이었다.
머릿속으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지급 지연이 다시 발생하면, 다음 지급일까지 최소 열흘. 통장에 남은 돈은 팔만 원 남짓. 라면으로도 못 버틴다.
뒤통수가 살짝 뜨거워졌다.
'확률을 써보아라.'
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겉옷 안주머니에 넣어둔 상태였다. 목소리가 어디서 나는 건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냥 뒤통수 안쪽에서 울리는 느낌이었다.
"뭘로요."
담당자가 서류를 뒤적이는 손을 멈추지 않는 걸 보면서, 나는 최대한 작게 입을 움직였다. 옆자리에서 누가 들으면 딱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각도였다.
'저 여자가 서류를 다시 찾아볼 확률.'
말이 되나 싶었다. 이런 걸로 뭘 어떻게 바꾼다는 건지. 그런데 밑져야 본전이었다. 잃을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발 한 번만 다시 찾아봐줘.
"저기, 혹시 다시 한번만 확인해주실 수 있을까요. 어제 분명히 접수한 것 같은데."
담당자가 한숨을 쉬며 다시 시스템을 뒤적였다.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는 소리,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 몇 초가 몇 분처럼 느껴졌다.
"어…… 잠깐만요. 여기 있네요. 어제 오후 늦게 들어온 게 시스템 반영이 늦었나 봐요."
다행이었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됐네요."
담당자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표정을 관리하려고 애썼는데 아마 잘 안 됐을 거다.
밖으로 나오면서 뒤통수가 다시 화끈거렸다. 이번엔 두통도 좀 있었다. 관자놀이 근처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뭔가 뇌 안쪽에서 혈관이 살짝 부풀어 오르는 듯한, 익숙하지 않은 통증이었다.
"이거 매번 이렇게 아파요?"
'확률이 낮을수록 더 아프다. 저건 원래도 시스템 오류였을 확률이 높았으니 그리 큰 대가는 아니었다.'
"아니 그럼 원래 될 일이었던 거예요?"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확실히 뒤틀었다고 장담은 못 하마.'
뭔가 사기당한 느낌이었지만 결과는 좋았으니 넘어갔다. 어쨌든 이번 달 지급은 지켰다. 그거면 됐다.
오후에는 알바 재계약이 있었다. 사장님이 계약서를 다시 쓰자고 했다.
가게에 들어서니 사장님이 이미 계약서를 뽑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종이 한 장에 도장 찍을 자리만 비어 있는, 딱 봐도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계약서였다.
"도현씨, 시급은 그대로 가는 걸로. 대신 근무 시간은 좀 늘려줬으면 하는데."
최저임금보다 십 원 더 준다던 그 자랑, 여전히 유효했다. 사장님은 그 십 원을 마치 대단한 복지처럼 얘기하는 버릇이 있었다.
"저 시급 좀 올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건 좀…… 요즘 매출이 안 좋아서."
늘 듣는 말이었다. 매출 안 좋다는 소리는 이 동네 사장님들 사이에 유행하는 인사말 같았다.
뒤통수가 다시 뜨거워졌다.
'해볼 테냐.'
"이번엔 뭘로요."
'저 인간이 마음을 바꿀 확률.'
"그게 낮은 확률이라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이란 원래 확률이 낮은 것 아니냐.'
뭔가 철학적인 대답이었다. 반박할 말이 딱히 없었다. 나는 일단 시도해봤다.
제발 조금이라도 올려줘라.
사장님이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볼펜을 딸깍거리면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척, 실제로는 아무 숫자도 안 누르면서.
"음, 그럼 백 원만 올려줄게요. 대신 진짜 열심히 해줘요."
백 원. 그래도 오른 건 올랐다. 시급 백 원은 하루 여덟 시간 근무 기준으로 팔백 원, 한 달이면 이만 사천 원 정도.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뒤통수가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세게 화끈거렸다. 눈앞이 잠깐 흔들렸다. 시야 한쪽이 잠깐 노랗게 번쩍였다가 사라졌다.
"어, 어지러워요."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자갈 하나 위치를 옮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명심해라.'
"백 원 올리는 데 이렇게 아파야 돼요?"
'값어치는 확률이 정하는 것이지 결과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집에 돌아와서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었다. 몸이 그냥 무거웠다. 씻지도 못하고 옷도 그대로였다.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다음 날 아침이었다.
다음 날, 나는 슬슬 이 힘의 쓸모를 깨닫기 시작했다. 작은 확률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유리하게 당기면 세상이 살짝 다르게 흘러갔다.
버스가 늦게 오지 않는 것. 편의점에 손님이 몰리지 않는 시간대를 미리 아는 것. 사소한 것들이었다. 신호등이 좀 더 빨리 바뀌는 것. 자판기에서 음료수가 한 번에 잘 나오는 것.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들.
그런데 그 사소한 것들이 쌓이니 삶이 조금씩 편해졌다. 신기하게도, 매번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정도는 확률에 정확히 비례했다. 아주 낮은 확률, 즉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억지로 당기면 두통이 심했고, 원래도 될 법한 일을 살짝 밀어주는 정도면 미열 정도로 끝났다.
책은 그런 나를 보며 자꾸 한마디씩 덧붙였다.
'욕심이 과하면 몸이 못 버틴다.'
"알겠다니까요."
'알겠다고 말만 하는 원숭이는 항상 사고를 친다.'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요."
'수십 세기를 지켜봤으니까.'
그 말에 잠깐 멈칫했다. 수십 세기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수십 세기라니. 당신 대체 몇 살이에요."
'그건 알려줄 생각이 없다.'
또 저 식이었다. 알려줄 건 알려주고, 알려줄 마음 없는 건 절대 안 알려주는 이 책의 태도가 슬슬 익숙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답답했는데, 요즘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게 됐다. 어차피 캐물어도 안 나올 거, 캐묻는 힘이라도 아끼는 게 나았다.
그날 밤, 나는 편의점 야간 근무를 서면서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새벽 세 시 편의점은 늘 조용했다. 손님이 거의 없는 시간대라 형광등 소리랑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매대를 정리하고,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을 골라내고, 커피 머신을 청소하고. 그런 반복적인 일들로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매장 안으로 들어온 손님 하나가, 계속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새벽 세 시에 정장을 입고 편의점에 들어올 사람은 흔치 않았다. 넥타이까지 완벽하게 매고, 구두도 반짝거렸다. 이 시간에 이 동네에 있을 만한 행색이 아니었다.
처음엔 그냥 우연히 눈이 마주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매대 사이를 오가면서도 남자의 시선이 계속 이쪽에 붙어 있는 게 느껴졌다. 등 뒤가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삼각김밥 하나를 계산대에 올렸다.
"천오백 원입니다."
남자가 지갑을 꺼내면서 나를 빤히 봤다. 지갑 안에 카드가 여러 장 꽂혀 있는 게 보였는데, 그 카드들조차 뭔가 평범한 회사원 것 같지 않았다.
"이도현씨."
내 이름표를 보고 부른 게 아니었다. 명찰에는 그냥 '도현'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성까지 부를 이유가 없었다.
"……저 아세요?"
남자가 웃었다. 웃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입꼬리만 올라가고, 눈동자는 나를 관찰하듯 가만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빛이 편의점 형광등 아래에서 유난히 서늘하게 보였다.
"재밌는 걸 갖고 있더군요."
뒤통수가 순식간에 얼음처럼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