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칼끝이 눈앞에서 떨렸다.
남자의 손도 같이 떨렸다.
칼날에 가로등 불빛이 반사됐다. 노란빛이 흔들리는 걸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영화 세트장에 잘못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갑, 폰, 다 꺼내."
목소리도 떨렸다.
이 새끼도 처음 해보는 짓이구나,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죽음이 코앞인데 그런 생각이 먼저 든다는 게 웃겼다. 사람이 죽기 직전엔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던데, 나는 강도의 서투른 자세를 분석하고 있었다.
골목은 좁았다. 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렸다. 인적은 없었다. 새벽 세 시, 마감을 끝내고 나온 편의점 뒷골목이 이렇게 조용할 줄은 몰랐다. 평소엔 취객 한둘이라도 지나갔는데, 하필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인생이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집중해라, 원숭이.'
머릿속에서 그 목소리가 들렸다. 이 상황에 그 소리가 들린다는 게 더 웃겼다.
"닥쳐."
내가 대답했다. 남자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나한테 한 말인 줄 알았나 보다.
"뭐, 뭐라고?"
"아니, 당신 말고."
어이없는 대화였다. 죽기 직전에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게.
남자의 손이 더 떨렸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게 눈에 보였다. 저 표정, 안다. 알바 시절에 진상 손님 상대할 때 짓던 표정이랑 똑같았다. 자기가 우위에 있는데도 확신이 없는 얼굴.
칼이 다시 다가왔다. 배 쪽이었다. 몸을 틀었다. 옷깃이 스쳤다. 뜨거운 감각은 없었다. 아직 안 베인 거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등이 벽에 닿았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벽돌 표면이 등을 긁었다. 차가웠다. 이 온도를 느낄 정신이 있다는 게 웃겼다.
'하나만 골라라.' 그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네가 원하는 결과를 하나만 골라. 나머지는 내가 밀어주마.'
"뭘 고르라는 거야, 지금."
머릿속으로 소리쳤다. 입 밖으로는 안 나왔다. 그럴 정신도 없었다.
'저놈이 발을 헛디디는 것. 그 정도면 되겠지.'
목소리는 태평했다. 사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저렇게 여유로울 수가 있나. 나중에 알았지만, 저 목소리한테 여유롭지 않은 순간이 있긴 한 건지도 의문이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그런데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헛디뎌라, 제발."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미친놈처럼 보였겠지. 강도한테 대고 발 헛디디라고 소리치는 놈, 어디서도 본 적 없을 것이다.
남자의 발이 삐끗했다.
정말로.
가로등 밑에 있던 자갈 하나, 딱 그만큼 튀어나와 있던 그 자갈에 발끝이 걸렸다. 남자가 앞으로 쏟아졌다. 칼이 허공을 갈랐다. 나는 옆으로 몸을 던졌다. 어깨가 바닥에 부딪혔다, 아팠다. 그래도 살았다.
남자는 넘어진 채로 신음했다. 칼이 바닥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신고할까, 잡을까, 그런 생각은 아예 안 들었다. 그냥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본능만 남아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뛰었다. 뒤도 안 돌아봤다.
다섯 블록을 뛰고 나서야 멈췄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넘어질 때 짚었나 보다. 편의점 조끼는 어디서 벗겨졌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오른쪽 소매가 반쯤 찢어져 있었다.
뒤통수는 여전히 뜨거웠다.
'봤느냐. 확률이란 그런 것이다. 저 자갈이 거기 있을 확률, 저놈이 그 위치를 밟을 확률, 발이 걸릴 확률. 하나하나는 별것 아니지. 그것들을 한 줄로 세워놓으면.'
"그게 뭔데."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목숨이 되는 것이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말 못 하겠다. 다만 그날 이후로 내가 걷는 길바닥의 돌 하나까지 신경 쓰게 됐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편의점까지 걸어서 돌아가는 삼십 분 동안, 심장이 계속 쿵쿵거렸다. 신고를 해야 하나 싶었지만, 신고하면 뭐라고 설명할 건가. 강도한테 발 헛디디라고 소리쳤더니 진짜 헛디뎠어요, 그래서 도망쳤어요. 이걸 누가 믿나.
경찰서 대신 집으로 갔다. 씻지도 못하고 이불 속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뒤통수의 열감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가라앉았다.
이렇게 되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고작 한 달이었다. 그런데 그 한 달이 인생을 통째로 뒤집었다.
한 달 전 나는 실업급여 수급자였다. 명문대라고 불리는 곳을 나왔지만 그게 밥을 먹여주진 않았다. 졸업하고 이 년, 취업은 안 됐고 대신 시급 9,860원짜리 야간 편의점 알바를 얻었다. 사장은 최저임금보다 십 원 더 준다는 사실을 자랑처럼 말했다.
"요즘 애들은 이것도 감사한 줄 몰라." 사장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그냥 웃었다. 반박할 힘도 없었다.
학자금 대출은 아직 천이백만 원 남아 있었다. 매달 갚는 돈은 이자만 겨우 커버했다. 원금은 줄지 않았다. 계산해보면 이대로 가면 십 년, 어쩌면 그 이상 걸릴 거라는 결론만 나왔다. 계산기를 두드릴수록 우울해져서, 나중엔 계산 자체를 그만뒀다.
부모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게 더 무서웠다. 밥상에서 아버지가 신문을 넘길 때마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머니는 반찬을 더 얹어주는 걸로 말을 대신했다. 그 침묵이 무슨 잔소리보다 무거웠다.
친구들 몇은 연락이 끊겼다. 취업했다는 소식, 결혼한다는 소식이 SNS로 간간이 들어왔다. 나는 그런 걸 볼 때마다 앱을 지웠다가 다시 깔았다가 했다. 지운다고 마음이 편해지지도 않았지만.
그날, 편의점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 아니라, 그보다 며칠 전이었다. 나는 인사동에 있었다.
왜 인사동에 갔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걷고 싶었던 것 같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는데 걷기라도 해야 살 것 같은 날이었다. 이력서를 서른 통쯤 넣고 서른 통 다 서류에서 떨어진 다음 날이었나. 정확히는 기억 안 난다. 그런 날들이 너무 많아서 구별이 안 된다.
골목 안쪽에 있는 헌책방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간판도 없었다. 유리문에 붙은 종이에 손글씨로 '헌책 삽니다 팝니다'라고만 써 있었다. 글씨체가 삐뚤빼뚤해서 초등학생이 쓴 것 같았다.
들어갔다. 딱히 살 생각도 없었다.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책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사람 하나 지나갈 통로만 남기고 다 책이었다. 발밑에도 책이 쌓여 있어서 걸을 때마다 종이 눌리는 소리가 났다.
주인은 안 보였다. 종을 흔들어봤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가게 안쪽에서 라디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는데, 사람 목소리는 없었다.
그냥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갈색 표지, 제목이 금박으로 박혀 있었다. 다른 책들은 색이 다 바랬는데 그 책만 유난히 금박이 반짝거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원숭이도 아는 마법 사용법』
제목이 웃겨서 집어 들었다. 그게 다였다. 서점 알바가 이런 걸로 낚시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표지를 넘기려는데, 갑자기 손끝이 저려왔다.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놀라서 손을 뗐다.
그런데 책은 이미 내 손안에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붙어 있었다. 떼려고 해도 떼어지지 않았다. 손바닥을 흔들어봤지만 책은 그대로 붙어서 딸려왔다. 벽에 손을 대고 밀어봤다. 안 떨어졌다.
식은땀이 났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헌책방 한가운데서, 손에 책이 붙은 채로, 아무것도 못 하고 서 있었다.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 이 좁은 나라 이 좁은 골목까지 흘러오는데 걸린 시간을 알기나 하느냐.'
"……뭐야, 이거."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도 없었다. 미친 게 아니라면 이건 진짜였다.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없다. 다만 이제부터 너는 나의 계약자다, 원숭이여.'
원숭이.
첫 만남부터 그 소리를 들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때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이 목소리가 나를 얼마나 험한 곳으로 끌고 갈지 하나도 몰랐다. 그냥 손에 이상한 책이 붙어서 안 떨어진다는 사실 하나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날 그 책방에서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도망칠 수도 없었다. 손이 붙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