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발끝만 보고 걸었다.
서준이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옆에서 걸었다.
"괜찮아? 데려다줄까?"
"아니… 혼자 갈 수 있어."
나는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지만, 서준은 결국 우리 집 앞까지 함께 걸어왔다.
가로등 불빛이 우리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 그림자마저도 오늘은 어딘가 어긋난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그냥 쉬어. 클랜온라인은 나중에 접속해도 돼."
서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오늘 접속할 거야. 오히려 그게 나을 것 같아."
(계속 이 생각만 하고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
서준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저녁에 문자할게."
그는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돌아보았다.
나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듣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안은 고요했다.
어머니는 아직 근무 중이셨다.
불 꺼진 거실은 낮 동안의 열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몸에 남은 불쾌한 감각을 씻어내고 싶었다.
옷을 벗어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는 손길이 거칠었다.
샤워기를 틀자 뜨거운 물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오늘 하루가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물줄기가 목덜미를 지나 등을 타고 흘렀다.
따뜻한 김이 좁은 욕실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온기 속에서 나는 잠시나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몸을 씻던 도중, 이상한 감각이 온몸을 스쳤다.
손끝이 저릿했다.
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한 미세한 떨림이었다.
(뭐지, 이 느낌…)
처음엔 그냥 물이 너무 뜨거워서 그런가 싶었다.
하지만 떨림은 사라지지 않고 팔을 타고 점점 위로 올라왔다.
어깨, 목덜미, 그리고 정수리까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낯선 파문이었다.
나는 눈을 뜨고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손이 작아져 있었다.
(잠깐… 이게 무슨…)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여보았다.
분명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데, 크기와 모양이 완전히 달랐다.
손톱의 모양도, 손등의 뼈 마디도 전부 낯설었다.
나는 급히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손으로 닦아냈다.
손바닥이 지나간 자리마다 물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 안에 비친 모습을 보고,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거울 속에는 낯선 소녀가 서 있었다.
작고 여린 몸, 커다란 눈, 부드러운 얼굴선.
(이게… 나야?)
손을 뻗어 얼굴을 만져보았다.
거울 속의 소녀도 똑같이 손을 뻗었다.
차가운 유리에 손끝이 닿는 순간, 이것이 환영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선명해졌다.
콧날도, 눈매도, 심지어 눈동자 색까지 전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다만 그 눈빛 속에 담긴 두려움만은 낯설지 않았다.
그건 분명 나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타일 바닥의 감촉이 낯설게 느껴졌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숨이 가빠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욕실 안의 온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거울 속에는 여전히 아홉 살에서 열한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방울이 뚝, 뚝 떨어지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나는 두 팔로 몸을 감싸안았다.
작아진 팔이 낯선 어깨를 감싸는 감각조차 이상했다.
(이게 진짜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급하게 스마트폰을 찾았지만, 손이 너무 작아져서 화면을 제대로 누를 수 없었다.
손가락 끝이 화면 위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몇 번이나 잘못된 자음을 눌렀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서준이한테… 연락해야 해.)
간신히 문자를 몇 개 눌러 보냈다.
[서준아 큰일났어 지금 당장 와줘]
손이 떨려서 글자가 엉망으로 찍혔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행히 서준은 근처에 있었는지, 몇 분 후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낯선 몸의 균형을 맞추지 못해 자꾸 휘청거렸다.
문을 열자 서준이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도현이야?"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 있었다.
서준은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는 그의 손길이 어딘가 서두르는 듯했다.
"일단… 옷부터 입자."
그는 애써 담담한 척하며 내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다가, 결국 가장 아래쪽 서랍에서 멈췄다.
"이거… 예전에 네가 어릴 때 입던 옷 있잖아. 그거 입으면 맞을 것 같은데."
서준은 서랍 깊은 곳에서 작은 옷가지를 찾아 건넸다.
낡은 티셔츠와 반바지였다.
어머니가 오래전에 버리지 않고 보관해두었던 것들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겨우 그 말을 꺼냈다.
목소리마저 낯설게 변해 있었다.
맑고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다시 한번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건… 진짜 일어난 일이야.)
서준은 방문을 등지고 서서 기다렸다.
그의 넓은 등판이 문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 뒤에서 조심스럽게 옷을 갈아입었다.
헐렁했던 예전 옷이 지금은 딱 맞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소파의 푹신한 감촉조차 예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몸이 작아지니 세상의 모든 것이 커진 것 같았다.
서준은 맞은편에 앉아 조심스럽게 나를 살폈다.
"어떻게 된 거야? 언제부터 이랬어?"
"몰라… 씻다가 갑자기…"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작아진 손가락이 여전히 낯설었다.
손바닥에 닿는 얼굴의 윤곽마저 예전과 달랐다.
"혹시…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그런 건 아닐까?"
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르겠어. 근데 그런 이유로 이런 일이 생길 리가 없잖아."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게 더 무서워.)
거실 안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서준은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뭔가를 필사적으로 떠올리려는 표정이었다.
서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했다.
"혹시… 누나한테 연락해볼래? 뭔가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누나…)
이서연, 나의 누나.
요즘 연락이 뜸했던, 그러나 왠지 모르게 이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언젠가 누나가 스쳐 지나가듯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뭔가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작은 손으로 겨우 화면을 눌러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누나 나 지금 이상한 일이 생겼어. 연락 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화면을 붙잡고 있었다.
답장이 올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누나는 원래도 연락이 느린 사람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누나뿐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방 안의 불빛만이 낮게 웅웅거리듯 흔들리고 있었다.
서준은 여전히 내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나를 향한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시선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 낯선 몸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실감했다.
스마트폰 화면이 조용히 꺼졌다.
나는 다시 화면을 켜서 누나와의 대화창을 바라보았다.
읽음 표시조차 뜨지 않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왔다.
서준이 조심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작아진 몸에 닿은 그 손의 온기가 유일한 현실감처럼 느껴졌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나랑 있자. 어머니 오시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생각해봐야 하고."
그의 말에 나는 그제야 뒤늦은 걱정이 밀려왔다.
어머니가 퇴근하고 돌아와 이 모습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현관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직 어머니가 돌아올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가능성만으로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때,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나는 숨을 삼키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